"6·25 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과 유엔군 사령관직을 맡았던 매튜 리지웨이 장군.
그가 한국을 구했다는 사실이 잊혀지고 있다."
역사학자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 26일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 후퇴가 이뤄지고 전쟁이 한국과 미군에 어렵게 전개되고 있을 때 사령관을 맡아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리지웨이 장군이라면서 그의 공적을 자세히 소개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1950년 12월 지프 충돌 사고로 사망한 월턴 워커 장군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그가 지휘권을 인수할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2차 공세로 패주를 거듭하고 있었으며, 유엔군과 한국군 사이에서는 패배주의가 팽배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한국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또다시 함락되었다.
핸슨 연구원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반격을 위한 계획도 없었으며, 단지 부산으로 후퇴해 전열을 재정비하거나 일본으로 철수하는 비상계획이 검토되고 있었다"면서 "이런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리지웨이 장군은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장교들을 경질하고, 식량과 보급품을 개선하는 등 전열 재정비에 착수했다"고 평가했다.
핸슨 연구원은 "리지웨이 장군은 전세가 곧 미군에 유리하게 전환될 것으로 확신을 했다"면서 리지웨이 장군은 한반도 북쪽으로 깊숙이 진격한 유엔군이 타격을 입은 것처럼 남쪽으로 멀리 내려온 중공군과 북한군이 보급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간파하고 우세한 공군력을 활용해 적의 후방을 맹폭격하는 전략을 펼쳤다고 말했다.
결국, 이러한 종합적인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에 부임한 지 100일도 안 된 1951년 3월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고 핸슨 연구원은 지적했다.
핸슨 연구원은 "놀라운 것은 한국이 여전히 분단된 상태라는 게 아니라, 오늘날 남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라면서 리지웨이 장군의 공이 없었다면 6.25 전쟁 때 한반도가 공산화됐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핸슨 연구원은 "1993년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열린 리지웨이 장군의 장례식에서 콜린 파월 장군이 `모든 미국의 군인들은 이 위대한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한국인들과 미국인들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1951년 4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뒤를 이어 극동연합군 사령관(유엔군 사령관)이 되어 6.25 전쟁을 총지휘한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어 유럽연합군 사령관과 미 육군 참모장을 거쳐 1955년 퇴역하고 나서 1993년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