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간송 전형필' 선생의 장손 전인건 관장이 운영하는 간송미술관 전경. 이충현 기자28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성북구에 있는 간송미술관에 법원 집행관들이 찾아왔다. 미술관에 전시 중인 국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중문병'에 대한 압류 집행을 하기 위해서다.
채무자는 간송미술관을 운영하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장손 전인건 관장. 현장에는 서울북부지법 소속 법원 집행관들과 함께 채권자인 제작업체 쓰리헤드하트핸드 이상훈 대표 측도 동행했다. 제작업체 측은 압류 이후 실제 반출까지 계획하고 문화재 훼손 우려를 최소화할 수 있는 운송과 보관 방안 등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그러나 압류는 집행되지 못했다. 해당 국보는 전 관장 일가 측의 소유지만, 점유는 간송미술문화재단에 속해있기 때문이었다. 민사집행법상 제3자가 점유하고 있는 물건을 압류하기 위해서는 제3자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하다. 결국 재단 측이 점유 사실 확인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압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집행관들도 철수했다.
압류 시도가 이뤄진 이날도 미술관 내부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학생 단체 관람객 등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압류 대상이었던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은 전시관 2층 안쪽 중앙에 전시돼 있었다. 백자 앞에 선 관람객들은 유물을 한참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28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성북구에 있는 간송미술관에서 법원 집행관들이 미술관 측에 압류 집행 관련 서류를 보여주고 있다. 이충현 기자이번 압류 집행 시도는 전 관장이 주최한 미디어아트 전시 정산금 분쟁 과정에서 비롯됐다. 문제가 된 전시는 지난 2024년 8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 미디어아트 전시다. 간송문화재단과 한 언론사가 공동 주최했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등이 후원했다.
전 관장은 개인회사 '케이엠엠아트컨설팅'을 통해 해당 전시를 직접 기획·추진했다. 그러나 흥행에 실패했다. 전 관장 측에 따르면 약 60억 원 정도가 투자됐지만, 40억 원 이상 적자가 났다. 결국 전시에 참여한 제작업체 4곳은 전시 종료 이후에도 정산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업체들의 총 계약금액은 약 16억5천만원 규모인데, 이 가운데 약 13억5천만원이 미지급 상태다. (관련 기사 : [단독]'간송미술관' 관장, 사기 혐의 피소…정산금 미지급)
이에 업체들은 지난해 8월 전 관장 측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북부지법 제13민사부(장용범 판사)는 지난달 30일 업체들의 손을 들어주며 전 관장이 업체들에게 미지급금인 원금 약 13억5천만원을 지급하라고 1심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가 원고들에게 이 사건 각 용역계약 대금 중 원고들이 받은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대금과 추가계약 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다"며 "피고는 원고들에게 그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미지급금과 지연손해금 등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판결에 따라 전 관장은 각 업체에 미지급 원금과 함께 연 6%의 지연이자, 판결 확정 이후에는 연 12%의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전 관장이 현재까지 판결금을 지급하지 않으면서 업체 측이 전 관장 일가 측 소유의 국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중문병'에 압류를 신청한 것이다.
28일 오후 2시쯤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 관람객들이 전시품을 관람하고 있다. 김수정 기자전 관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미 법원에서 판결한 금액에 해당하는 만큼 제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 등 부동산에 대한 압류가 진행된 상태"라며 "이번 압류 시도는 과잉 집행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또, 압류가 무산된 이유와 관련해서 "공익법인이 공익 목적으로 관리하는 문화재에 대해서는 강제집행이 제한된다는 판례도 있을 뿐더러 문화재보호법상 국보의 위치가 옮겨지는 등 현상 변경을 위해서는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국보의 반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채무에 대해 현재도 변제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며 "그러나 채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간송미술관과 재단이 관리하는 국보 문화재까지 압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압류 대상이 됐던 국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이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전시장 2층에 전시돼 있다. 김수정 기자압류 대상이었던 조선시대 백자 중 하나인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은 1997년 국보로 지정됐다. 길게 뻗은 목 부분과 둥근 몸체에 꽃과 벌레 문양 등이 청화·철채·동채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이 유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문화재 수집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간송 전형필 선생이 경매를 통해 거액을 주고 사들였다. 경기 지역의 한 야산에서 노부부에 의해 발견된 뒤 오랫동안 참기름병으로 사용됐다는 일화로 대중들에게도 알려진 문화재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전형필 선생 일가 소유 상당수 국보·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한편 전 관장은 제작업체 측으로부터 사기 혐의로도 고소돼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제작업체 측은 전 관장이 정산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전시를 무리하게 추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