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민 기자삼성전자 노조의 파업 예고로 대한민국 전체가 바짝 긴장하고 있던 지난 1일. 기업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홈플러스 노조는 '임금 포기'를 선언했다. 대신 이를 상품 공급 등 운영 자금으로 투입하자고 제안했다.
노조는 그러면서 "임금은 노동자 피와 땀의 결정체이지만, 회사가 무너지면 그 의미도 사라지는 만큼 회사 회생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임금 포기 배경을 설명했다.
홈플러스 노조원들은 이어 지난 25일에는 청와대 앞에서 이재명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지만 결국 대치중이던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의 댓가까지 포기한 홈플러스 노조원들의 생존투쟁은 수십조원의 성과급을 요구하며 '30조원 손실'도 우습게 여기는 삼성전자 노조와 대척점에 서있다.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최승호 위원장. 연합뉴스삼성전자 노조의 요구는 간단하다. AI 붐을 등에 업은 반도체 초호황기를 맞아 회사가 수백조원의 영업이익을 내게 됐으니 직원들에게도 일정부분을 나눠달라는 것이다.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미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삼기로 한 만큼 삼성전자 노조도 경쟁사로의 인재유출을 명분 삼아 같은 방식의 지급을 요구했다.
여기다 수십조원의 성과급 요구가 과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불법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도 회사와의 교섭이 결렬된 뒤 고용노동부나 노동위원회에 조정신청, 그리고 조합원 투표를 거친 경우 단체행동, 즉 파업권을 보장하고 있다.
삼성전자 노조는 이런 법적 요건을 모두 갖췄다. 따라서 노조의 파업은 업무방해죄 등 형사상 처벌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사측은 손해배상 등 민사상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결국 삼성전자 노조는 경쟁사의 전례를 참고삼아 합법의 틀안에서 성과급을 요구한 셈이다. 삼성전자 사측이 협상내내 노조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삼성전자 노조에 대한 국민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특히, 성과급 액수가 과하다는 것 못지않게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노조의 태도에 대한 비판여론도 크다
대한민국에서 노조의 역사는 민주화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으로 항거한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재야운동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탄압, YH무역 노조 농성 폭력 진압, 사북광산 항쟁, 구로동맹파업 보복 숙청 사건 등을 거치며 노동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노조를 향한 물리적 폭력과 탄압은 상대적으로 줄었지만 정리해고와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등으로 노조 탄압은 이어졌다.
이에 맞서 노조법은 더욱 견고하게 개정됐고, 올해 3월부터는 하청·특수고용 노동자의 교섭권 보장과 기업의 과도한 손해배상 소송 방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소위 '노란봉투법'이 시행됐다.
이렇게 대한민국 노동법의 역사는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기 위해, 또 공권력이 동원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선배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녹아든 희생의 역사이다.
연합뉴스그런데, 그런 노동법의 열매를 가장 알차게 따먹고 있는 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아닌 노조 없이도 지난 수십년간 최고 대우를 받아온 삼성전자 직원들이다.
30조원 쯤은 없는셈 칠 수 있을 정도로 통큰 삼성전자 노조는 반도체 생산차질로 인한 국가경제적 손실은 물론 수많은 하청업체와 하청노동자들이 입을 수 있는 피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같은 회사에 소속돼 일하는 DX부문, 즉 비반도체 분야 직원들의 이익도 사측과의 협상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한 노조에게 하청노동자와의 연대나 배려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과도한 기대일지 모른다.
한쪽에선 회사를 살리기 위해 피와 땀의 결정체인 임금까지 포기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수십조원을 내놓으라며 국가 경제와 회사의 미래를 담보잡는다. 이 극단적인 양극화가 이제 대한민국 노동계의 뉴노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