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발달장애인 권리옹호단체 피플퍼스트 서울센터에서 소형민씨(좌), 박경인씨(우)가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발달장애인이자 피플퍼스트의 동료지원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지은 기자발달장애인 박경인(32)씨는 지난 4일 한 달도 남지 않은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걱정이 많았다. 어색한 환경, 글씨가 가득한 생소한 투표용지. 발달장애인들은 낯선 환경에 놓이면 당황하기 일쑤다. 박씨는 "머리가 멈추는 것 같아요. 엉뚱한 사람을 찍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지만, 발달장애인은 '진땀의 시간'을 걱정하기도 한다.
발달장애인들의 온전한 참정권 보장을 위한 요구들은 10년째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투표 보조 보장, 쉬운 투표용지 도입, 이해하기 쉬운 공약집 등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현행법에 발달장애인을 따로 규정한 내용이 없다는 점과 별도의 용지·용구 개발에 드는 비용·시간 등을 이유로 이런 요구들을 곧장 수용하기 난처하다는 입장이다.
'낯선 공간' 치명적인 발달장애인들
제21대 대통령선거 투표일인 3일 서울 영등구포의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발달장애가 있는 박씨는 낯선 환경에서 기표소처럼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당황해서 사람의 이름을 까먹거나 헷갈려 한다. 발달장애인은 익숙한 환경을 안전하게 여기고 낯설고 폐쇄된 환경에서 당황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 소형민(31)씨도 과거 투표소에서 낯선 분위기와 어려운 말들을 마주했던 경험을 전했다. 투표사무원의 설명은 부족했고, 투표보조가 필요한지 확인하기 위한 요청들은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이것 해봐라, 이것도 해봐라' 하니까 주목도 받고 비웃음을 받는 것 같아 힘들었다"며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다가 일단 찍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발달장애인들은 투표를 도와줄 '투표 보조인'이 필요하다. 투표 보조인은 본인이 직접 지정하며, 자신이 뽑고 싶은 후보·정당에게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박씨는 투표 보조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 "투표보조가 필요하다고 하니 주민등록번호를 말해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주민등록번호를 얘기했더니 '투표보조 필요 없으신 것 같은데요'라고 하더라고요". 박씨는 올해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일에 걱정이 앞선다.
사실 발달장애인들에게 투표 보조인이 동행했던 시기가 있었다. 과거에는 중앙선관위 지침에 발달장애인에 투표 보조가 허용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2020년 중앙선관위가 돌연 해당 지침을 삭제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은 '시각장애나 신체장애로 인해 직접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가족 또는 본인이 지정한 2인의 도움을 받아 투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법률에 '발달장애인'에 대한 별도의 규정이 없기 때문에 삭제됐다는 게 중앙선관위의 설명이다. 이 때부터 투표소마다 발달장애인의 투표 보조 지원이 제각각이며, 대부분 지원받지 못했다는 게 발달장애인들의 주장이다.
이에 발달장애인들은 2023년 국가를 상대로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2심 재판부는 발달장애의 특성상 투표소에서 자신의 의사대로 투표를 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도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는 자기결정권 침해 우려가 있어 발달장애인에게 투표보조를 제공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현행 법 체계에서는 대리 투표나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경우를 방지하면서 투표를 보조하도록 하는 제도가 없다. 발달장애인의 보호자 등이 대리 투표를 하는 것을 방지하는 대책 없이 무조건적으로 허용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림 투표용지'가 '비밀투표' 원칙 훼손할까
피플퍼스트가 제안하는 그림투표용지. 정당 이름에 색깔이 입혀져 있고, 후보자 이름 옆에는 사진이 붙어있다.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제공그림 투표용지 도입 역시 발달장애인들의 줄기찬 요구다. 그림 투표용지는 후보자의 사진과 정당 로고, 색상 등을 넣어 만든 투표용지로, 사각형 표 안에 이름이 빼곡히 들어 있는 투표용지와 다르다.
박씨는 "투표용지에 이름만 쓰여 있어서 헷갈릴 때가 많다"며 "현수막에는 사진이 다 있는데 막상 투표장에 가면 못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OO을 찍고 싶은데 얼굴은 알고 이름은 까먹거나 '이 당이 무슨 색이었지?' 한다. 당황하니 더 머릿속에 안 들어오고 머리가 멈추는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는 발달장애인의 표가 특정되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의 수가 많지 않은 선거구에서는 이들의 어느 후보에게 투표했는지 가늠하기가 쉬워 비밀 투표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또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발달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투표용지를 별도로 만들면, 발달장애인이 1~2명만 있는 투표구에서는 개표 단계에서 발달장애인 표가 특정이 된다"며 "만약 투표용지 전체를 바꾸게 되면 짧은 시간 안에 컬러 인쇄를 할 시설, 개표 장비 등을 전면 교체해야 해서 예산 소요가 크다"고 설명했다.
피플퍼스트가 요구하는 투표보조용구. 후보자 사진, 당의 색깔과 로고가 들어간 용구를 기존 투표용지에 끼워서 사용할 수 있다.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제공그림 투표용지 도입 등을 위한 소송도 진행 중이다. 발달장애인들은 차별구제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2024년 2심 재판부는 "피고(정부)는 공직 선거에서 원고(발달장애인)들이 요구할 경우 투표 보조 용구, 사진 등을 이용해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기구를 마련하고 제공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이에 기존 투표용지에 후보자 사진, 정당 로고나 색깔 등이 있는 보조용구를 끼우는 방식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하지만 선관위는 1년 내 용구를 개발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등 현실적 이유로 상고했다.
발달장애인도 공약이 궁금하다
발달장애인들 역시 공약을 보고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를 찾고 싶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발달장애인들을 배려하지 않은 공약집들이 대부분이다.
현행법은 '공직선거 후보자 및 정당은 장애인에게 후보자와 정당에 관한 정보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중앙선관위도 2024년 초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제작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좌), 김문수 후보(우)가 발표한 쉬운 공약. 이 후보는 장애인 공약을, 김 후보는 10대 공약을 쉽게 설명해 놓았다. 각 후보 측 제공하지만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을 제작한 현황을 살펴보면, 여전히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민주노동당이 '쉬운 공약'을 만들었지만 사전투표 직전에야 배포됐다. 또 민주노동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장애인 공약'만, 국민의힘은 '10대 공약'만을 쉬운 공약으로 제공해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공직선거법상 의무가 아닌 '권고'일 뿐이라 '이해하기 쉬운 공약집' 제작은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발달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유권자를 위해서라도 쉬운 공약 등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발달장애인 권리옹호 단체 피플퍼스트에서 동료지원가로도 활동하는 박씨는 "지금 공보물로는 어떤 정책을 할 건지 내용을 알 수가 없어 누구를 뽑아야 할지 어렵다"며 "정당들이 이해하기 쉬운 공보물을 고민하고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외치는 참정권은 발달장애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투표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도록 그림투표용지도 쓰고 투표보조도 잘 지원되고, 쉬운 공보물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