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 들던 손, 노조 가입서를 쥐다…광장 청년들의 '진짜 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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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을 든 청년, 노조 조끼를 입다
12.3 내란 1년 동안 광장에서 노조로의 선택을 한 청년들
권수아·최별하·윤예원 인터뷰

12·3 비상계엄 1년을 맞은 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에서 앞에서 열린 '12·3 내란·외환 청산과 종식, 사회대개혁 시민대행진'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피켓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박종민 기자12·3 비상계엄 1년을 맞은 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에서 앞에서 열린 '12·3 내란·외환 청산과 종식, 사회대개혁 시민대행진'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피켓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박종민 기자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앞은 1년 전 그날처럼 두 개의 세계로 쪼개졌다. 한쪽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청년들' 등 보수단체가 모여 이날을 '계몽절'이라 칭하며 "계엄은 정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시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1년 전의 불법 계엄을 '정당한 권한 행사'라 주장하며 맞불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계몽을 이어가는 청년들이 있다. 1년 전 '아이돌 응원봉'과 '마인크래프트 횃불'을 들고 광장을 지켰던 이들이다. 이들은 계엄이 끝난 뒤 흩어지지 않았다. 대신 '노동조합'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CBS 노컷뉴스는 계엄 반대와 윤석열 대통령 퇴진 집회에 참여했다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가입한 권수아(30), 최별하(22), 윤예원(23)씨의 얘기를 들어봤다. 이들에게 광장은 단순한 시위 장소가 아니었다. '연대의 힘'을 뼈저리게 느낀 학습의 장이었다.

 "상식이 무너진 밤, 가족을 지키려 나갔다"

권수아(30)씨가 지난 3월 20일 비상행동 주최 집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권수아(30)씨가 지난 3월 20일 비상행동 주최 집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
이들을 광장으로 불러낸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본능이었다.

전직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출신인 권씨에게 12월 3일 밤은 공포와 분노의 시간이었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밤새 연락을 돌리던 그는 계엄군의 황당한 해명을 듣고 거리로 나섰다.

권씨는 "공무원일을 하면서 시의회랑 소통을 하는 일도 했다"며 "계엄령 사실을 알고 관련된 내용을 보면서
너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느꼈다. 그는 "새벽까지 유튜브를 보다가 해제되는 걸 보고 '불안하니까 우리 아침에 가자'고 해서 다음 날 아침 바로 국회 앞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각, 충남 천안에서 기말고사 레포트를 쓰던 대학생 최씨 역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스스로를 "정치 무관심층"이라 불렀던 그를 움직인 건 또래 친구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최씨는 "SNS에서 '꺼지지 않는 빛이 있다면 응원봉 아니겠느냐'는 글이 돌았다"며 "차라리 친구들이 다치느니 내가 가서 다치겠다는 마음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투쟁 도구 대신 아이돌 응원봉을 손에 쥐고 상경했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 표결이 있던 밤이었다.

윤씨는 자신만의 문화적 코드를 들고나왔다. 그는 "12월 6일 밤 좋아하는 게임인 마인크래프트 속 횃불을 들고 나갔다"고 했다. 촛불 대신 게임 아이템인 횃불을, 깃발 대신 아이돌 응원봉을 든 이들은 기존의 시위 문법을 완전히 뒤집으며 광장의 주역이 됐다.

'키세스 군단'과 '핫팩'… 광장은 학교였다

권수아(30) 지난 1월 4일 한남동 촛불시위에서 은박지를 뒤집어 쓴 채 인터뷰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권수아(30) 지난 1월 4일 한남동 촛불시위에서 은박지를 뒤집어 쓴 채 인터뷰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
광장은 이들에게 '연대'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란 점을 느끼게 해줬다. 권씨는 한강진역 인근 농성 당시 은박 담요를 뒤집어쓴 채 현장을 지켰다. 그 모습이 초콜릿 과자를 닮았다 해서 '키세스 군단'이라 불리기도 했다.

권씨는 "지나가고 있으면 시민분들이 갑자기 핫팩이나 커피를 쥐여주고 가셨다"며 "천 명 정도 모인 카톡방에서 음식 배달해 주고 자원봉사자들이 꾸려지기도 했는데, 나름의 시스템을 갖고 굴러가는 걸 보며 저도 같이 거들었다. 민주노총이 주도했지만 시민들이 같이 움직이는 걸 그 안에서 봤다"고 설명했다. '연대'가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최씨에게 광장은 치유의 공간이었다. 2차 남태령 시위 당시 경찰 진압 과정에서 흉부가 압박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시민들과 노조였다.

최 씨는 "집회 현장에 가면 화장실 같은 데 핫팩을 가져가라고 써놓기도 하고, 우울증 이야기를 하면 '여기에 있어도 괜찮냐'며 공진단을 챙겨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빛사(세상을 빛내는 사람들:민주노총과 시민 간 커뮤니티 이름) 분들을 만나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윤씨 역시 민주노총에 씌워진 '폭력적'이라는 프레임을 광장에서 깼다. 윤 씨는 "개인으로 나가는 것보다 민주노총이랑 함께하니까 집회 자체가 안전하게 느껴졌다"며 "노동 의제를 잘 몰랐는데 (노조에서) 얘기해 주셔서 집회를 더 밀도 있게 다닐 수 있었다"고 밝혔다.

"혼자서는 1인 시위뿐… 뭉쳐야 바뀐다"

최별하(22)씨가 지난 1월 18일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진행한 철야 집회에서 자유 발언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최별하(22)씨가 지난 1월 18일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진행한 철야 집회에서 자유 발언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탄핵의 봄이 오자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권씨는 지난 5월 1일 노동절, 민주노총 가입서에 서명했다. 그는 "탄핵 기간 동안 우리가 직접 움직이고 목소리를 내야만 세상이 바뀐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혼자서는 1인 시위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나. 노조에 들어가서 나도 같이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가입 이유를 밝혔다. 현재 그는 공공연대노조 조직차장으로 일하며 공공 분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뛰고 있다.

특성화고 출신인 최씨는 지난 7월 특성화고노조에 가입했다. 그를 움직인 건 집회 현장에서 만난 특성화고 노조위원장의 한마디였다. 그 속에는 최씨가 학창 시절 내내 겪었던 '차별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최 씨는 "특성화고 출신들의 노동 환경의 열악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는데, 집회 현장에서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고민 끝에 가입을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윤씨 또한 지난 6월 1일부터 학교비정규직노조 선전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민주노총 청년특별위랑 같이 연대를 다니면서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결심을 했다"고 전했다.

2030이 말하는 진짜 '계몽'… "가르치는 게 아니라 깨닫는 것"

윤예원(23)씨가 지난 2월 15일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연단에 서 발언하는 모습. 민주노총 청년특위 제공윤예원(23)씨가 지난 2월 15일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연단에 서 발언하는 모습. 민주노총 청년특위 제공
보수 청년 단체들이 12월 3일을 '계몽절'이라 부르며 시민들을 깨우쳐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이들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권씨는 "(계몽절 주장은) 자기들 생각이 일단 옳고 저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으니 각성시켜야 된다는 근거에서 나온 것"이라며 "사실상 그 안에 갇혀 있다 보니, 직접 나와서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뭉쳐서 '내 말이 맞구나'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진정한 시민의식이라고 하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인정하고, 그 사회에서 불편함이 있으면 그걸 연대의 힘으로 바꿔 나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최씨는 "계몽령 집회 같은 건 정말 악질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며 "청년 세대 극우화에 대한 좀 해결점을 빨리 찾아야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많이 된다"고 했다. 이어 "시민들이 자신이 노동자라는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민의식을 깨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법 계엄을 이겨낸, "꺼지지 않는 촛불, 빛나는 응원봉"을 들었던 이들은 이제 노동조합이라는 현장으로 들어갔다. 지난 3일 여의도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계몽"이라는 구호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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