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는 70~80년대 산업화 시기 서울시민을 버티게 해 준 것이 "강원도의 힘"이었노라고 설파한 바 있다. 팍팍한 서울살이에 지친 이들이 거리상 그다지 멀지 않으면서도 금방 깊은 산과 맑은 강을 볼 수 있는 곳, 즉 빠르게 만만하게 서울을 잊을 수 있는 곳이 '강원도'였다는 설명이다.
김현철이 부른 '춘천 가는 기차'도 그 맥락에서 읽힌다. 평상시는 소주와 삼겹살의 힘으로 살다가, 못 견딜 정도가 되면 '강원도'라는 보약을 한번씩 먹어야만 거친 서울의 일상을 버텨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강원도가 유럽과 동남아 등 '해외'로 대체된 것은 1990~2000년대에 들어서였다. 경제적으로 좀 여유도 생기고 해외여행도 쉬워지면서, 서울과 수도권뿐 아니라 전국의 도시민들은 '휴식과 휴가, 충전의 장소'로 지방 산천보다 외국을 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휴가와 휴식의 트렌드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일상 속 장소나 주변 둘레길을 새로운 눈으로 걸으며 내가 살아온 곳을 재발견하는 여행이 그것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골목과 거리 그리고 둘레길들이 재조명되고 일상 속으로 떠나는 걷기 여행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그리고 이런 트렌드의 중심에는, '벗어나야 할 팍팍한 곳'에서 '역사와 자연, 문화가 숨쉬는 곳'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 중인 '서울'이 있다.
여름휴가를 맞아, 우리도 서울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번 여름휴가 서울여행의 키워드는 '서울 속 세계여행', 특히 서울 속 이방인들의 작은 골목 속에 펼쳐진 '세계 현지 음식 여행'이다.
여행의 시작과 끝은 누가 뭐래도 그곳 특유의 먹을거리 아니겠는가. 이번 휴가에는 다른 곳 아닌 서울에서 외국인과 만나 다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그 나라의 색다른 음식을 만끽하면서 배와 가슴이 함께 행복한 포만감에 젖어보자.
해외여행 계획을 세웠던 분들이라면, 그 예산의 반의 반 가격으로 전에 없던 ‘세계 맛 여행’을 즐기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몰랐던 서울 그리고 일상의 공간을 재발견하는 신선함도 누리게 될 것이다.
앞으로 몇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네팔, 필리핀, 이슬람, 아프리카, 일본, 중국, 프랑스 등 '서울 속 세계음식여행'이 이어질 예정이다.
그저 유명한 식당을 찾는 식도락 여행이기보다는 서울 속 외국인들이 골목, 거리 혹은 마을에 나름의 커뮤니티를 형성한 곳을 찾아 그들의 삶과 음식을 함께 만나는 체험 여행으로 가급적 안내하고자 한다.
또한 해외 음식이면서도 자주 먹는 나라 요리보다는, 상대적으로 우리가 덜 먹어본 음식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오늘 처음으로 안내할 곳은 서울 4대문안 '동대문 주변 동촌 지역'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중앙아시아와 네팔, 필리핀'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아시아 최대 의류시장인 동대문시장이 있는 서울 동촌 지역 곳곳에는 동대문시장 상권에 터를 잡은 외국인 노동자와 외국 상인들의 모여 만든 소박한 골목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골목들을 걸으며 서울 속 이방인들을 만나고 평소 맛 볼 수 없었던 음식들을 즐길 뿐만 아니라, '백화점 문 닫는 시간에 문 열어서 백화점 문 여는 시간에 문 닫는' 동대문 의류도매시장 여름밤 쇼핑 산책을 함께 겸한다면, 더 없이 알차고 색다른 여행이 될 것이다.
중앙아시아골목. (사진=이진성 PD)
◈ 중앙아시아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는 서울한양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중 남소문에 광희문이 있다. 그리고 이 광희문 길 건너 광희동에는 키릴 문자들이 반기는, 이른바 ''이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몽골, 러시아 식당과 가게들이 몰려있는 작고 낡은 골목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5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오른쪽 길로 10m, 2차선 도로를 만나면 다시 왼쪽으로 10m, 그리고 나타나는 길 건너편 약국 골목을 끼고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비로소 그 골목이 얼굴을 내민다.
이곳에 중앙아시아인들의 골목이 만들어진 것은 동대문시장에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그리고 몽골 등지에서 온 보따리장수들이 터를 잡으면서부터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몽골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들, 러시아 상인들과 우리 고려인들을 이곳에서 모여들었다.
이들을 위한 식당과 잡화점, 여행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이 골목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몽골인들의 교류의 장이 됐다.
양고기 굽는 냄새가 특별하고도 고소한 이곳이, 그렇다고 중앙아시아풍의 건물이 늘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겨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골목이지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비로소 이 골목 안에 유목민들의 작은 우주가 펼쳐진다. 한국인은 이방인인 골목이다.
중앙아시아 음식. (사진=이진성 PD)
중앙아시아 음식의 주재료는 밀과 고기다. 인도 네팔 음식에 '난'이 있듯, 중앙아시아 음식에서는 '빵'이 늘 곁들여진다.
향이 짙으면서도 달콤하고 쫄깃한 양고기 및 소고기 꼬치 그리고 양고기 및 닭고기 바비큐, 단맛이 별로 없는 담백한 빵, 매운 소스와 간을 적당히 맞추면 당장 밥 말아먹고 싶어지는 수프와 소고기 감자 국물 요리, 고기 육수 진한 중앙아시아 국수와 중앙아시아식 만두 등이 5000원~10000원 사이 가격이다.
이 메뉴 중 4개를 시켜 먹으면 성인 4인의 식사로 별 부족함이 없다. 우리 입맛에 대체로 잘 맞지만 기름기 많은 만두와 고기류는 맥주나 콜라와 함께 먹어야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다.
(<사마르칸트> 02-2277-4267, <크라이로드노이> 02-2264-9380, <타바쑴> 02-2273-8777)
중앙아시아 음식을 즐긴 후라면, 동대문시장 곳곳을 산책하며 알뜰 쇼핑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네팔 음식점. (사진=이진성 PD)
◈ 네팔 동대문역 3번 출구 주변 그리고 우리은행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만나는 창신시장 골목. 이 큰 길가와 골목에 작은 네팔 음식점들과 가게들이 모여 있다.
남루해보이는 거리와 골목이지만, 이곳은 한국에 온 네팔인들이 무조건 한번은 꼭 찾는 '성지'와도 같은 장소다. 네팔인들에게는 그저 식당이나 가게 골목이 아닌, 만리타향 속 커뮤니티 장소이자 네팔인들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창신동은 동대문시장의 배후지로서 3천여개의 봉제공장이 모여있는 동네다. 이곳 창신동 봉제골목에 외국인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들어오면서 창신시장과 창신동 골목에 각국의 음식점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특히 네팔 음식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네팔의 맛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는 맛집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창신동에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의 하얀 산과 같이 순수한 네팔인들의 작은 일상도 만나고 네팔의 맛도 체험해보자.
이곳에서 네팔 음식점을 찾으려면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음식점들 상당수가 임대료가 싼 건물 2층에 있고, 그나마 그 가게들도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손님이 많은 곳은, 창신시장 골목으로 들어가서 10m 정도 걸어가면 만나는 삼거리의 오른편 건물 2층 '에베레스트'라는 식당이다. 네팔인들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온 서양 관광객들도 눈에 띄고, 네팔 음식을 맛보려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북적인다. 네팔 전통 술 뚱바와 네팔 정식 달파트 등 네팔 고유의 음식들을 즐길 수 있다.
동대문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창신시장 골목으로 접어들지 말고 그대로 좀 더 걸어가면 '뿌자(Pooja)'라는 식당을 만난다. 네팔 전통의 양고기 커리가 대표 메뉴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13번 출구 굿모닝시티 뒤쪽에 2호점을 낼 만큼 인기가 높다.
사장과 서빙, 주방장 모두 네팔인이다. 동묘역 방향으로 더 걸어가면 동묘역 8번 출구 앞에 네팔 음식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음식점이 있다. '히말라얀'이라는 이 식당은 인도 네팔 커리 원조의 맛에 6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난의 맛으로 유명하다. 특히 네팔식 치즈 빠니르를 얹은 시금치 커리가 인기.
이곳 네팔 음식점들은 음식의 맛과 양 그리고 가격 면에서 우리 입맛과 지갑 사정에 잘 맞는 메뉴로 인기를 얻고 있다.
네팔 음식. (사진=이진성 PD)
양고기 커리와 시금치 커리, 화덕에 살짝 익힌 닭고기와 양파 토마토 양념을 넣어 매콤하게 만든 치킨 티카 머설라 등을 6000원~12000원, 얇고 바삭한 갈릭난과 부드럽고 촉촉하며 두터운 버터난 등의 난 요리들을 2000원~2500원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히말라얀> 02-3672-1566, <에베레스트> 02-766-8850, <뿌자> 본점 02-744-2199, 2호점 02-2274-2922)
그리고 <에베레스트> 식당 앞 왼쪽 골목 그리고 동대문역 3번 출구 옆에 각각 자리 잡은 네팔 잡화 식료품 가게들도 함께 들러보자. 작은 가게지만, 과자와 식료품, 옷과 침구류 등 네팔의 생활필수품들이 모여 있어서 그들의 일상을 조금 엿볼 수 있는 장소다.
(<나마스떼 인="" 서울=""> 02-3675-1812, <파슈파티> 02-766-5330)
네팔 음식여행을 마쳤다면, 3천여개의 봉제골목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서민동네 창신동 골목을 산책하거나, 국내 완구 학용품의 메카로 알려진 창신동 완구 골목을 거닐어보자.
필리핀 마켓. (사진=이진성 PD)
◈ 필리핀 매주 일요일, 혜화동성당 앞 50m 거리는 필리핀 마켓으로 북적인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을 찾은 필리핀 노동자들.
1995년 서울 자양동 성당에서 한국인 수녀가 대부분 카톨릭 신자인 필리핀인들을 위한 미사를 드리면서 객지 생활하는 이들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문제를 상담하기 시작했고, 사람 수가 불어나자 혜화동 성당으로 미사 장소를 옮기면서 이곳에 필리핀인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 혜화동 성당에서는 필리핀인들을 위한 영어미사가 진행되며, 일요일 성당 앞에서는 필리핏 마켓이 열리고 있다. 필리핀인들이 한주간의 지친 삶을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교제하는 종교적 경제적 교류의 장이 성당을 근거지로 삼아 혜화동에 마련된 것이다.
마켓 상인들 모두 필리핀 사람이지만 한국어를 잘 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혜화동 성당에서 동성고등학교 정문까지 50m 넓은 보도블럭 거리에 매주 일요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20개 가량의 노점이 들어선다.
따로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방금 요리된 음식들을 필리핀 음료들과 함께 맛볼 수 있다. 특히 여름에는 우베아이스크림, 강낭콩, 코코넛 등을 넣은 필리핀 인기 팥빙수 '할로할로(Halohalo)'를 먹을 수 있고, '발룻'이라고 불리는 부화 직전의 오리알도 이곳이 아니면 먹기 힘든 별미 음식이다.
필리핀 음식. (사진=이진성 PD)
커리 종류의 필리핀 음식을 골라 담을 수 있는 식판 식사가 6000원. 돼지고기 꼬치 3000원, 야채말이튀김 1000원, 바나나튀김 1000원 등, 가격 수준은 우리 길거리 음식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곳에 있는 것은 먹을거리뿐이 아니다. 필리핀에서 넘어온 의류와 생필품 심지어 중고 가전제품까지 나와 있는 커다란 장터다.
필리핀 마켓이 일요일에만 서는 야외 장터라면, 평일에도 필리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필리핀인들의 식당이 역시 혜화동에 자리하고 있다. 'KAIN AN SA HEWA - 카인안사 혜화'. 필리핀 사람들에게 고향의 맛을 제공해주고 있는 일종의 미니뷔페다.
혜화로터리 SK주유소 옆 연우소극장 입구에 있는 작고 허름한 식당이다. 필리핀식 누들에다가 우리 갈비와 맛이 비슷한 돼지고기를 반찬으로 고르고 밥을 푸짐히 퍼 담으면 6000원 가격. 고향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필리핀인들뿐 아니라 필리핀 여행의 추억을 간직한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혜화동 필리핀 마켓 그리고 필리핀 식당 '카인안사 혜화', 모두 혜화역 1번 출구를 이용하면 된다. 고된 서울살이의 애환을 간직한 필리핀인들을 만나고 마음을 나눠볼 수 있는 도심 속 작은 필리핀으로 올 여름 떠나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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