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들에 이런 역사가? 이름 속 서울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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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재발견-7] ''도로명과 지명''으로 본 역사도시 서울의 나이테

도시가 품은 이름에는 그 도시의 역사가 녹아있다. 고려 남경으로부터 1000년 고도이자 조선 한성으로부터의 600년 수도로서의 역사도시 서울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서울 곳곳의 ''이름''들을 통해 지금부터 서울을 재발견해보자.

◈ 고려 이후 1000년의 동네 이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면서 고려 제1의 수도인 ''''개경''''을 뒤로 하고 고려 제2의 수도격인 ''''남경''''으로 천도했다. 조선의 수도가 된 그 ''''남경''''은 지금 서울 사대문안의 인왕산 자락에서 창덕궁 뒷산인 북악산 응봉 자락에 이르는 터였으며, 남경의 궁은 지금의 경복궁 권역의 서북쪽과 청와대 터에 자리잡았다.

바로 이 고려시대 남경 시대의 역사가 지금 서울의 지명에도 남아있으니, 그것이 지금 종로 운현궁 뒤 ''''교동초등학교''''로 알려져 있는 1000년 된 동네 이름 ''교동이다. 이는, 고려시대 교육기관 향교가 있던 마을 이름인 ''''향교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최근 발간된 책 <오래된 서울="">(최종현, 김창희 저)에 따르면, 고려시대 이곳의 향교는 지금 교동초등학교와 운현궁 뒤편 낮은 언덕에 남서향으로 기대앉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21세기 지명을 지배하는 조선 ''''도성과 성문''''의 힘

서울의 구도심, 즉 사대문 안은 지금도 ''''성곽도시''''다. 조선 개국과 수도 건설 당시 지어진 18km의 성곽, 그리고 그 성곽을 드나들기 위한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의 이름은 그래서 600년이 지금도 서울 도로명과 지명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지금도 성곽과 성문을 기준으로 부르고 있는 서울의 지명과 도로명은 무엇일까?

성곽을 기준으로 한 방위를 따서 만든 ''성북구(성북동)''와 ''성동구'', 대문의 이름을 가지고 만든 ''서대문구'', ''동대문구'', ''남대문로'', 소문의 이름으로 따서 만든 동소문(혜화문)의 ''동소문동''과 ''동소문로'' 그리고 ''혜화동'', 서소문의 ''서소문로''와 ''서소문동'', 남소문(광희문)의 ''광희동'' 등이 그 예다.

여기서 함께 짚어볼 이름이 바로 ''신문로(새문안길)''와 ''자하문 터널'' 그리고 ''신당동''과 ''아현(애오개)''이다.

지금 우리가 ''새문안길'' 혹은 ''신문로''라고 부르고 있는 길은 서대문역에서 세종로사거리를 잇는 왕복 8차선길이다. 이 길 이름은 서대문의 속칭인 ''새문'' 혹은 그 한자어인 ''新門''에서 유래했다. 세종 때 서대문 위치를 사직터널 부근에서 지금의 정동길 입구 강북삼성병원 앞자리로 옮겼고, 그때부터 서대문은 새로 옮겨 지은 새문 혹은 신문으로 불렸다. 그래서 지금도 서대문 안쪽 길 이름을 ''새문안길'' 혹은 ''신문로''라고 부르고 있다.

''자하문 터널''은 종로구 청운동과 부암동을 잇는 창의문 고개 밑의 터널이다. 여기서 ''자하문''이라는 이름은 ''창의문''의 속칭으로, 여기서 ''자하(紫霞)''란 보랏빛의 노을을 뜻하는 단어다. 도성의 서북쪽에 자리한 창의문은 서쪽 인왕산 너머 번지는 해질녘 노을의 자줏빛 장관을 연출하던 자핫골에 있었고, 그래서 창의문의 속칭이 자하문이 돼서, 지금의 자하문 터널과 자하문길의 이름을 낳은 것이다.

다음으로 ''신당동''과 ''아현동(애오개)''.

''신당동''의 명칭은 광희문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는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에 시신은 도성 밖으로 나가야 했고, 도성 시신을 운구하는 문으로 ''광희문''이 많이 사용됐다. 이 문 밖에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무당을 찾는 이들이 많아 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모여 살았고, 그래서 이곳은 신당이 모여있는 동네 즉 ''神堂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 후 이 이름은 갑오개혁 때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洞)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아현''은 아이고개인 兒峴에서 유래했고, 우리말로 애오개로 불린다. 이 명칭 역시 ''서소문''과 연결된다. 이곳이 아현 즉 아이고개로 불리게 된 이유를 두고 세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고개의 지형이 엄마 등에 업힌 아기 모습을 닮아 아이고개라고 불렀다는 설. 또 하나는, 풍수지리적으로 도성의 주산 모양이 아이가 달아나는 형세라서 이것을 막기 위해 이 고개 이름을 ''아이를 달래는 고개''라고 지었다는 설.

그리고 하나는, 도성의 시체 중 아이의 시신은 ''서소문''을 통해 나가게 했는데 이때 서소문으로 나간 아이 시신이 넘어 묻힌 고개가 이곳이라 아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그것이다. 실제로 아현동 산 7번지 일대에 아이들의 무덤인 아총(兒塚)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이런 아총과 아현의 명칭은 바로 서소문과 연결된다는 설명이다.

◈ 조선시대 ''종교''가 남긴 서울의 이름들

서울 종로구 종묘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고, 유교는 화려한 종교건축을 멀리하기에 조선의 수도에서는 서구 기독교국가나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의 수도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종교 건축 유산을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종교는 조상신과 농경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핵심이었고, 조상신 즉 왕의 조상과 선친왕의 위패를 두고 제사하는 ''종묘'' 그리고 땅과 곡식의 신 즉 농경신에게 제사하는 ''사직''이 조선 수도의 주요 종교시설이다. 그리고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삼아 매년 춘분과 추분에 풍년 기원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도 대표적인 조선 한성부의 종교시설 중 하나.

여기서 사직단이 위치한 곳이 종로구 ''사직동'' 그리고 선농단이 자리한 곳이 동대문구 ''제기동''이다. 사직동(社稷洞)의 명칭은 사직단에서 비롯됐고, 제기동(祭基洞)이란 이름은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던 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설렁탕''의 유래도 선농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선농제 때 각 도에서 올라온 농부들에게 점심으로 소를 잡아 곰국을 끓여 뚝배기에 밥을 말아서 먹였는데, 이 국을 선농탕(先農湯)으로 불렀고 이것이 지금의 설렁탕이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묘 옆 돌담길은 지금도 ''순라길''로 불리는데, 조선시대 순라군들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야간에 종묘의 화재와 도적을 경계하느라 순찰을 돌던 데에서 생긴 이름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널리 퍼진 또 하나의 신앙 체계 중 하나가 바로 풍수지리다. 조선시대에는 누에농사가 매우 큰 위상을 차지했고 이 누에농사를 위한 뽕나무밭을 어디에 조성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는데, 여기에 풍수지리가 작용을 했다. 남산의 모양이 누에가 앉은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이 남산의 동쪽 봉우리가 향하는 한강 이남과 서쪽 봉우리가 향하는 한강 이남에 각각 뽕나무밭을 만들었으니, 그 하나가 지금의 ''잠실''이고 또 하나가 지금의 ''잠원''이다.

◈ 외세의 침략과 민족 자존심이 새긴 길 위의 흔적

서울 구 도심 사대문안을 동서로 가르는 중심 도로를 위에서 아례로 배열하면 ''율곡로, 종로, 청계천로, 을지로, 퇴계로''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 퇴계로와 을지로 사이에 동서로 ''충무로''가 나 있다.

이 길에 그런 이름들이 만들어진 배경은 무엇일까?

먼저, ''을지로''와 ''충무로''.

지금 ''을지로''로 불리는 서울시청 앞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이 2.74㎞, 너비 30m의 도로. 이곳에 19세기말 청나라 군대가 도성 내에 진주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이뤄졌다. 이런 침략과 간섭의 상처를 역사 속 영웅을 통해 덮어보고자, 1946년 이곳 도로의 이름을 중국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니, 이것이 ''을지로''다.

''충무로''도 마찬가지다. 서울중앙우체국에서 극동빌딩을 지나 충무로5가 8번지에 이르는 1.75㎞, 너비 10∼20m인 길. 도심지 남쪽을 동서로 관통하며 퇴계로와 명동로 사이에 있는 이 길은 일제강점기 본정통(本町通)으로 불리던 일본인의 핵심 본거지였다. 이 지역이 상징하는 일제 침략의 상처를 가려줄 영웅이 또한 필요했고, 그래서 왜군을 격퇴한 장군 이순신(李舜臣)의 시호로 1946년에 만든 현재의 도로명이 바로 ''충무로''다.

그런데 이처럼 도로의 이름이 무신의 이름으로만 채워질 수는 없으니, 조선을 대표하는 문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로가 바로 ''율곡로''와 ''퇴계로''다.

이렇게 외세의 침략이 준 상처를 그 외세를 물리쳤던 ''영웅''으로 싸매려는 노력은, 충무로와 을지로에 그치지 않는다.

''충정로''도 비슷한 맥락이다. 서대문로터리에서 아현삼거리에 이르는 이 길은, 갑신정변 당시 주한일본공사 이름을 따서 만든 ''죽첨로''로 불려오다가, 해방 후 을사조약 때 순국한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를 붙인 이름으로 바꾸면서 ''충정로''가 됐다.

동대문에서 청량리로 이어지는 ''왕산로'' 역시, 임진왜란 당시 왜장이 동대문으로 입성했던 길로, 해방 후 대한제국 당시 의병장이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호를 붙인 것이다.

◈ 시간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땅 이름들

지금의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일대는 조선시대 도성의 동쪽 내사산인 낙산에서 동쪽 외사산인 아차산까지 넓은 들이 펼쳐져 있던 지역이다. 조선은 이 땅을 목장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지명에도 오롯이 담겨 있다. 말목장이라는 듯의 ''마장동'', 목장 맞은편이라는 뜻의 ''면목동'', 목장 안 넓은 들판이란 뜻의 ''장안평'', 암말을 기르던 동네라는 뜻의 ''자양동''이 그 예다.

바로 이렇게 말 목장이 있던 곳에 1960년대 도축장이 들어서면서 우시장이 만들어지고, 지금은 단일육류시장으로 세계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마장동 축산물시장지금의 축산 전문시장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양마장 → 도축장 → 우시장 → 고기 도매상 변신 → 마장동 축산물시장으로 발전해 온 역사의 궤적이자 장소를 지배하는 시간의 힘이다.

서울 한강 뚝섬유원지역 광장의

 

''뚝섬 역시 같은 맥락이다. 말 목장은 왕의 사냥터나 군사 훈련장으로 이용됐는데, 왕이 군사 훈련을 직접 지휘할 때는 커다란 깃발을 땅에 꽂았고 그 깃발을 ''독기''라 했다. ''독기를 꽂은 섬''이라는 뜻의 독섬이 오를 우로 발음하는 서울 사투리에 따라 지금의 ''뚝섬''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21세기 서울이 갖는, 600년 나아가 1000년 역사도시로서의 면모를 서울의 길과 동네 이름 속에서 찾아봤다. 위에서 언급한 이름들 외에도, 종각이 있어서 종각 이름을 딴 ''종로'',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을 향하는 ''돈화문로'' 등과 같이, 도성 안의 정치 시설에 따라 만들어진 서울의 랜드마크와 같은 이름들뿐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발견하면 보석처럼 빛날 골목골목 수많은 세월의 이야기를 품은 이름들이 도처에 산재해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매력의 역사도시 서울, 그 서울을 우리 각자의 동네와 길이 갖는 ''이름''들을 통해 재발견해보면 어떨까.

이진성PD (twitter.com/js8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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