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국군포로 1호'' 가족 납북피해자 인정
1968년 2월 경북 포항시의 한 초등학교 관사.
이 학교 교장의 아들 안용수(당시 16세)군은 영문도 모른 채 군용 지프를 타고 육군보안사령부 포항지부 사무실로 끌려갔다.
보안사 요원들은 "북한에서 누가 너희 집을 찾아오게 돼 있다.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요원들은 어리둥절해하는 안군의 머리에 양동이를 덮어씌우고 발길질을 해댔다.
아픈 건 둘째치고 귓가에 울리는 쇳소리에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일명 ''돌림빵'' 고문이었다.
안군이 보안사에 끌려간 이유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행방불명된 형 안학수 하사 때문이었다.
1964년 베트남에 파병된 형은 1966년 사이공(현 호찌민)으로 외출했다가 실종됐다.
정부는 이듬해 ''안학수가 자진 월북했다''는 북한 평양방송의 보도만을 근거로 안 하사가 탈영해 월북했다고 단정하고 가족들의 동향 수집에 열을 올렸다.
안군은 3월 포항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한 달 동안 입학을 미뤘다. 보안사 사무실이 고교 운동장 모퉁이에 붙어 있어 겁이 났다.
고교 졸업장은 따야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학교에 갔지만 요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안군을 찾아왔다.
보안사 요원들은 안군을 다시 사무실로 데려가 고문했다. 머리채를 잡아 고춧가루를 탄 물에 집어넣거나 야전삽으로 구타했다.
요원들은 안군의 집에 쌀이 늘어난 사실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접선하는 간첩이 누군지 대라며 윽박질렀다.
안군은 서울교대에 진학하고서야 보안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경찰 정보관이가끔 찾아오긴 했지만 잡아가거나 가혹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형은 실종된 지 33년이 지난 2009년 월북자가 아닌 ''베트남전 국군포로 1호''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사이 아버지는 강제로 사직당했다. 안용수씨 역시 대학을 졸업해 교사 자격증을 따고서도 교단에 설 수 없었다.
성인이 된 안씨는 외상 후 스트레스와 반복성 우울장애 등 정신질환을 앓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여름에도 속옷을 두 겹 껴입었다.
안씨는 형이 월북의 누명을 벗은 뒤 납북피해자 보상 및 지원 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을 신청했지만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실제로 안씨의 정신질환은 1993년에야 발병해 보안사 요원들의 폭행과 인과관계를 밝히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수사기록 등 직접 근거도 없었다.
45년 묵은 안씨의 서러움은 법정에서 풀렸다.
안씨는 "납북피해자 불인정 처분을 취소하라"며 심의위원회를 상대로 2011년 12월 소송을 냈다.
고교 때 같은 반 친구들은 증인으로 나와 "안씨가 한 달에 1∼2번 보안사로 호출됐고 벌게진 얼굴로 허리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돌아오곤 했다"고 진술했다.
3학년 때 담임교사도 "안씨가 보안사에 다녀온 후 정신을 잃어 양호실에 보낸 적이 있다. 이런 일 때문에 결석이 많았지만 보안사 때문이라고 기재할 수 없어서 생활기록부에는 ''가정사정''으로 결석했다고 적었다"는 내용의 사실확인서를 보내왔다.
안씨의 생활기록부에는 3년 동안 조퇴를 3번, 결석은 72번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윤인성 부장판사)는 이런 근거와 임상심리사의 심리학적 평가보고서 등을 토대로 "국가 공권력 행사와 안씨의 상이(傷痍) 사이의 인과관계를인정할 수 있다"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고 30일 밝혔다.
재판부는 "교사와 급우들의 사실확인과 증언, 생활기록부 등만으로도 안씨가 고교 재학 중 보안사에 소환돼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정신과 질환이 뒤늦게 나타난 데 대해 "질병이 계속 진행돼 왔거나 상당한 기간 전에 이미 발병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