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현지시간)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의 인연이 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소도시의 땅콩 농부이자, 해군 출신인 카터 전 대통령은 1963년 조지아 주의회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주지사를 지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워싱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카터는 '무명 인사'나 다름었다.
하지만 1972년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고 말았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물러났지만 미국인들은 참신한 정치인의 출현을 갈망했고, 그 자리에 지미 카터가 명함을 내민 것이다.
1976년 미국 대선에서 카터가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를 누르고 백악관행을 결정지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었다.
1977년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이어진 카터 행정부는 한국 현대사의 암흑기와 정확히 겹친다.
박정희 대통령과 사이가 안좋았던 그는 대선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4년 내내 꺼내들며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추후 기밀 해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카터와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6월 정상회담 당시 이 문제를 놓고 '설전(舌戰)'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카터의 포기로 주한미군 철수는 없던 일이 됐지만 동맹국 사이에서 미국을 향한 불신이 커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그에 따른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로인해 아직도 한국 일각에서는 카터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지 않고 있다.
'깨끗한 정치인' 이미지로 대선에 승리했으나 카터는 임기 내내 인기가 많지 않았다.
인플레이션과 테헤란 미 대사관 점거 사태 등 국내외 악재로 재선에 실패했고, 1981년 퇴임할 당시 지지율은 34%에 불과했다.
다만 카터는 퇴임 이후 업적이 더 빛을 발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57세에 백악관을 떠나 고향인 조지아로 돌아가 비영리단체인 '카터 센터'를 설립해 분쟁 종식, 세계 민주주의 발전, 인권 보호, 질병 및 기아 퇴치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1994년 여름, 지미 카터는 또 다시 한반도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된다.
1차 북한 핵위기, 즉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북한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 간에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위기가 고조되자 중재자를 자처하고 평양을 방문해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았으나, 몇 주뒤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은 이뤄지지 못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수십 년간에 걸쳐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민주주의 및 인권 신장을 위해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