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토일드라마 '정년이'는 여성국극이란 생소한 소재로 시청률 16.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하 동일)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럼에도 방영 내내 원작 웹툰과 비교하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정년이의 첫 소녀팬이자 또 다른 여성 서사의 큰 축을 담당하는 부용이 캐릭터 삭제부터 조연 캐릭터들의 '결혼 엔딩'까지 크고 작은 논란이 계속됐다.
'정년이'를 연출한 정지인 PD는 전작 '옷소매 붉은 끝동'(이하 '옷소매')에서 대개 판타지에 가깝게 그려졌던 조선 왕실 여성들의 실제 삶에 주목했다. 그 결과 '옷소매'는 성덕임이란 여자 주인공의 관점에서 완성된 로맨스로 시청률 17.4%를 달성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옷소매' 역시 원작 소설이 있었던 드라마임을 감안하면 지금과는 다소 다른 평가다.
이렇게 정 PD는 원작의 가이드라인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색을 입히는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왔다. 시청률만 놓고 보면 '정년이'의 경우, 보편성을 염두에 둔 현실적 타협이 옳았을지 모른다. 정 PD 역시 치열한 고민 끝에 '선택과 집중'을 결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런 선택들이 모여 여성 캐릭터와 퀴어 로맨스를 지우고, 조연 캐릭터의 '결혼 엔딩'을 낳았다. '옷소매'처럼 '정년이'도 원작보다 퇴보하지 않길, 오히려 진일보하길 바랐던 시청자들에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사다난했던 '정년이' 제작기를 정 PD에게 들어봤다. 다음은 정지인 PD와의 일문일답.
Q '정년이'가 높은 시청률로 성공을 거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청자 반응이 있다면?
A 배우와 스태프들과 함께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물이 이런 큰 사랑을 받게 돼서 무척 기쁩니다. '정년이'를 사랑하고 응원해 주신 시청자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시청자 반응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국극에 대한 반응들입니다. 집에서 이런 걸 돈 주고 봐도 되냐는 댓글들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Q '정년이' 연출에 있어 주안점을 둔 부분은?
A 현대의 많은 시청자들에게는 생소한 장르인 여성국극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지 가장 고민이 많았습니다. 국극은 당시 관객들이 현실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던 최고의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는 점을 생각하며 우리 시청자들도 그에 못지않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무대의 커튼이 열리는 순간, 마치 놀이공원에 처음 입장하는 듯한 기대감과 흥분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드라마 속의 관객과 시청자들이 동일한 선상에서 이런 기분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지 촬영 전부터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방향을 잡았습니다.
Q 낯선 소재로 시청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A 소재가 다소 낯선 만큼, 이야기와 캐릭터들은 최대한 보편성을 띨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또한 원작의 생생한 캐릭터들이 어떤 배우들을 만나야 더 큰 생동감을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캐스팅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다행히 김태리씨를 비롯해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배우들이 합류해 준 덕에 쉽지 않은 작품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Q 가장 공들여 촬영한 장면은 무엇인지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A 아무래도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총력을 기울인 건 국극 장면들이었습니다. 보통 주 2~4회의 촬영을 진행하면 나머지 날들은 배우들이 연습을 하고 스태프들은 틈틈이 국극 장면을 구현하기 위한 회의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보통 한 작품당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기간이 평균적으로 소요됐습니다.
국극을 제외한 촬영 중 가장 공들인 건 아무래도 10회 엔딩, 용례(문소리 분)가 부르는 추월만정을 정년(김태리 분)이 처음으로 듣는 장면이었습니다. 대본 상황에 적합한 장소를 촬영 시기에 임박해 겨우 구했고, 일출과 밀물과 썰물 시간대를 몇 달 전부터 계산해서 두 번에 걸쳐 촬영한 장면입니다. 한 씬을 이렇게 오래 준비해 찍은 건 연출하면서 처음 있는 경험입니다. 며칠에 걸쳐 찍으며 훌륭한 감정선을 연기한 두 배우 덕에 화룡점정을 찍으며 완성할 수 있던 장면입니다.
Q 김태리, 신예은, 라미란, 정은채, 김윤혜 등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였다. 함께 작업한 소감은?
A 김태리씨가 쏟은 열정과 노력은 우리 작품을 떠받치는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체력적, 정신적으로 쉽지 않은 순간이 올 때 정년이를 생각하면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촬영 중 반전을 보여준 신예은(영서 역)씨의 순간들도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종종 허영서와 신예은을 오가며 장난칠 때마다 다시 영서로 돌아오라고 말로는 그랬지만 속으로는 주머니 속에 넣어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라미란(소복 역)씨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현신이었습니다. 단원들과 있을 때는 여고생같이 해맑게 있다가 촬영만 들어가면 어느새 소복으로 초 집중하는 모습에 수차례 반했습니다. 정은채(옥경 역)와 김윤혜(혜랑 역)는 매란의 왕자와 공주로서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저 역시 온달과 평강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때가 참 슬펐습니다. 둘의 마지막 무대가 드디어 끝났고 이제는 보지 못할 조합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날 정도로 아쉬웠습니다.
다시는 만나기 힘든 배우들의 조합이라 생각합니다. 이분들과 그 외의 모든 분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큰 영광이었습니다.
Q '정년이'가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면 좋을까?
A 소리 한 가락, 한 소절을 우연히라도 듣게 되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인데 아, '정년이'에서 나왔구나!' 정도의 반응만 나와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Q 부용이 캐릭터 삭제를 비롯해 MBC와의 갈등까지 시작하기도 전에 많은 부침이 있었다. 방송 중 네이버웹툰 불매 조롱 논란의 워딩이 그대로 유튜브 제목에 올라와 해당 제목이 바뀌기도 했다. 이런 이슈들이 '정년이'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지, 그럼에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
A 사실 외적인 이슈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방송이 끝나는 순간까지 온전히 작품 자체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좋은 시청률이 나온 건 결국 배우와 스텝들 모두가 1년여를 고생한 결과물이 시청자들에게 재미있게 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
Q 제작발표회에서 원작보다는 보편적 감성에서 접근했지만, 부용이를 비롯한 원작의 여성 서사를 다른 캐릭터들을 통해 녹여내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가 끝난 지금,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얼마나 성취를 이뤘을까
A 각색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최대한 살릴 것을 살리되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습니다. 원작을 보지 않은 시청자들도 쉽게 볼 수 있는 방향에는 맞는 각색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작의 중요한 메시지를 쉽게 담아내지 못한 것은 저 역시 아쉬움이 남지만, 많은 시청자들을 훌륭한 원작으로 이끄는 이정표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