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12.3 내란사태'를 통해 젊은 세대는 비상 계엄을 처음 경험했지만, 과거 군사정권을 경험한 세대는 계엄을 공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1980년 계엄 선포 아래 평범했던 성경공부 모임이 반국가단체로 조작된 '한울회 사건' 피해자들은 오늘날까지도 계엄의 아픔을 잊지 못한 채 재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혜인 기잡니다.
[기자]
올해 61살인 예현주씨의 봄은 고등학생이었던 1981년에 멈춰있습니다.
1981년 3월 15일, 예씨는 평소처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평온하던 예배 현장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여고생이던 예현주 씨를 포함해 20여 명의 청년과 학생 등을 강제로 연행했습니다.
영문도 모른채 경찰서로 끌려간 예씨는 두려움에 떨며 한사람씩 불려가 조사받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이후 경찰 앞에 불려간 예씨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며 국가 반란을 꾀했다는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예현주 씨 / 한울회 사건 피해자]
"자본주의는 빈부의 차가 커서 나쁘고 공산주의는 빈부의 차가 없어서 좋으니 공산주의를 하자라고 했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진술서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다른 애는 들었다는데 너희는 왜 못 들었냐…"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전국에 비상 계엄을 확대 선포하면서 국민들은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계엄 통치 아래 종교 모임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1981년 당시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예현주 씨도 성경공부 모임 회원이라는 이유로 수시로 경찰에 연행돼 거짓 진술을 강요받았습니다.
예씨는 폭언과 욕설, 호통으로 일관하는 경찰의 압박에 친구와 함께 거짓 진술서를 쓰게 됐고, 이후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한울모임 참여자들이 구금되자 오랜 죄책감에 괴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예현주 씨 / 한울회 사건 피해자]
"(친구와) 둘이서 계속 강요를 당하니까 그러면 우리 이대로 토씨 하나 빼지 말고 그대로 쓰자 그러면 검사는 똑똑하니까 알겠지 어떻게 사람이 (두 명의 진술서가) 똑같을 수가 있겠냐 그래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베껴서 썼어요.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죠."
한울모임은 1980년경 대전의 기독 청년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성경공부 모임이었습니다.
계엄군이 시민들의 모임을 엄격히 통제하던 시절 경찰은 성경공부 모임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해 재판에 넘겼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유죄가 내려졌습니다.
[홍성환 씨 / 한울회 사건 피해자]
"처음에는 이렇게 가더니 별거 아니니 나갈 것 같다 이러더니만 조금 이따가 갑자기 어디 끌고 가더니만 그때부터 불법 구금이 돼가지고 반국가단체로 조작이 됐습니다."
당시 교사였던 홍성환 씨와 방위병이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종생 총무를 포함해 모임 참가자 중 6명은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종생 총무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울회 사건 피해자]
"갑자기 사복 형사들 한 10여 명이 저희들의 예배 장소에 들어와서 잠시 갈 데가 있다고,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거죠. 영장을 좀 보자 이런 얘기도 해야 되는데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저희들은 참 바보 같았죠. 따라갔던 것이 결국 (감옥에서) 2년 반 뒤에 나오게 되어지는…"
40년 넘게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81년의 봄을 상처로 기억해 온 예씨를 포함한 한울모임 회원들은 최근에서야 자신들이 국가폭력 희생자임을 세상에 외칠 수 있었습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12일 제68차 위원회에서 '한울회 사건'에 대해 중대한 인권 침해로 판단된다며 진실 규명을 결정했습니다.
이어 "국가에 대해 대전서부경찰서, 현 국군방첩사령부, 대전지방검찰청이 저지른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허위자백을 강요한 점 등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진실 규명 결정 이후 피해자들이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에 '반국가단체 구성이 아니었다'는 취지의 재심을 청구했지만 여전히 법원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계엄 통치 아래 가해진 국가폭력의 상처가 40여년이 지나도록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우리 사회는 '12.3 내란사태'로 또 한번의 큰 상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CBS 뉴스 한혜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