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지난 17일 "북한은 서울을 거치지 않고는 워싱턴으로 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은 설령 북미대화가 이뤄져도 "한국과 미국이 긴밀하게 사전에 조율해야 된다"고도 했다.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다음날 기자들과 만나 한국 '패싱'(배제) 우려와 관련해 보다 분명하게 밝혔다. 북한은 물론 트럼프 2기 행정부도 우리를 건너뛰고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가능케 할 전략적 수단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일단 북한과는 대화 통로 자체가 사라진 상태라 대북확성기방송 정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미국에 대해서도 공고한 한미동맹에 기대를 걸 순 있겠지만 트럼프 2기는 더욱 노골적인 거래적 동맹관을 지향한다. 우리가 지렛대를 갖기는커녕 일방적 미국 우선주의를 방어하는 것만도 벅차다.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은 오래된 전략이다. 북한은 언제나 남한을 제치고 미국과 직거래하려 했지만 미국은 상대해주지 않았다. 여기에는 우리 정부의 강력한 반대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는 대화를 시도하려는 쪽이 미국이라는 점에서 상황이 다르다.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배경에서든 북미대화를 추진할 경우 우리가 어떻게 제동을 걸 것인지 의문이다.
한국이 북미 중재자가 된 것은 문재인 정부 때가 유일하다. 한미동맹과 남북관계가 모두 좋았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백악관에서 북미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한 것은 그 상징적 장면이다.
이 역시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미국도 북한도 직거래 경로와 방법, 상대방 의중까지 잘 알고 있다. 직통전화마저 끊긴 남북과 달리 북미 간에는 최소한의 소통 채널(뉴욕 유엔대표부)이라도 있다.
실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1일 트럼프 당선에 대한 사실상 첫 반응을 보이며 모종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미국과 협상을 할 만큼 해봤지만 확인한 것은 결국 미국의 적대정책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는 대미협상 포기보다는 사전 '몸값 높이기' 포석이란 해석이 나온다. 미국 내에서도 점차 확산되고 있는 핵군축론과 무관치 않다. 북핵‧미사일 능력이 이미 고도화 된 이상 중간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의 반영이다.
만약 미국이 본토에 대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위협이라도 없애기 위해 '스몰 딜'을 추진한다면 우리 정부는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이 경우 자체 핵무장 불사의 결기라도 보일 수 있을까? 미국이라도 사정권에서 벗어나야 오히려 대북 핵억제가 강화된다는 논리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여기에다 일본마저 북일수교를 추진한다면 우리는 동북아의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은 누구보다 빨리 미국의 기류를 읽고 심지어 미국보다 먼저 움직이는 기민함을 보여 왔다.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가 한미일 공조 와중에도 대북 접근을 계속 시도한 게 대표적이다.
지금은 호기를 부릴 게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위험을 관리할 때다. 어느 날 눈 뜨고 보니 우리 주위에는 친구보다 적이 더 많아졌고 친구도 예전의 친구 같지 않다. 사방팔방 둘러봐도 답이 없다면 더 늦기 전에 노선을 바꾸는 게 순리에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