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불공정 약관을 내세워 귀책 사유가 없는 전세사기 피해자의 임대보증금 보증을 취소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관련 약관 조항은 시정권고 조치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HUG의 '개인임대사업자 임대보증금 보증 약관'을 심사해 보증 취소 관련 조항을 시정하도록 권고했다고 5일 밝혔다.
최근 주택임대차 계약과 관련해 임차인을 상대로 한 '전세사기'가 급증하면서 전세계약 종료 후에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25일 기준 국토부의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등으로 인정된 누적 건수는 2만3730건에 달한다.
이같은 피해로부터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해 민간임대주택 임대사업자는 HUG 등 보증기관의 임대보증금에 대한 보증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보증기관은 계약종료 이후 임대사업자가 임대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 경우 임차인에게 해당 금액을 지급하게 된다.
하지만 HUG는 약관에 민간임대주택의 임대인(주채무자)이 사기 또는 허위로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거나 이를 근거로 보증을 신청한 경우 임차인(보증채권자)의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보증을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HUG와 유사하게 임대보증금에 대한 보증을 제공하는 다른 기관들이 사기로 인해 계약이 취소되는 경우라도 임차인에게 귀책사유가 없으면 계약을 취소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실제 HUG는 부산에서 1명의 임대인이 소위 '무자본 갭투자'로 주택 190가구를 매입해 4년간 임차인 150여명으로부터 전세보증금 190억여원을 가로챈 사건에 대해 약관의 부당한 보증취소 조항을 근거로 보증을 취소했다.
이에 피해자들이 부당하게 임대보증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며 공정위에 신고했고, 일부는 HUG와 전세보증금 지급 청구 소송을 진행중이다.
공정위는 신고된 약관조항이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우선 문제의 조항으로 임차인은 본인의 잘못 없이도 임대인의 귀책 사유만으로 HUG로부터 보증금을 지급받을 수 없게 돼 이는 약관법의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에 해당한다고 봤다.
또한 해당 조항은 보험계약자의 사기,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더라도 피보험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가 없다면 보험자가 보험금액을 지급하도록 한 '상법' 규정의 취지에도 반하고, 이는 위험을 고객에게 떠넘기고, 사업자에게 법률상 부여되지 않은 해지권을 부여하는 조항으로도 볼 수 있다.
공정위는 여기에 해당 약관조항은 국민의 주거 안정이라는 민간임대주택 제도의 목적에도 맞지 않고, 보증계약에 따른 임차인의 기본적 권리(보증금을 반환받을 권리)도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공정위는 해당 조항은 계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로 계약에 따르는 본질적 권리를 제한하는 조항에도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이에 HUG에 해당 약관조항을 수정·삭제하도록 시정권고했다. 이후 HUG와 해당 약관조항에 대한 시정 협의를 진행하고, 이행 여부를 점검할 계획이다. 공정위는 사업자가 60일 이내에 시정권고를 따르지 않을 경우 시정명령을 할 수 있다.
공정위는 HUG가 시정권고에 따라 불공정한 약관을 시정하게 되면 앞으로 임대인의 잘못으로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선의의 임차인의 경우 보증을 통해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민간임대주택의 임대보증금이 대부분 임차인의 재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피해 주택이 다세대주택, 다가구 등이 주를 이루며, 피해자도 40세 미만 청년층이 다수라는 점에서 이번 조치가 서민, 청년 등 취약계층 임차인 보호에 기여하는 측면이 클 것으로 기대했다.
다만 공정위는 이번 약관심사는 이미 체결된 계약관계를 소급해 무효로 하는 것은 아니고, 사업자가 향후 계약 체결 시 문제된 약관조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