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약 한 달 만에 성사된 면담에서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추경호 원내대표와는 당일 '번개 만찬'을 하는 등 '윤(尹)-한(韓)' 두 사람의 만남 전후로 내놓은 일련의 메시지는 한 대표에게 굴욕을 안긴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친한(친한동훈)계를 중심으로 착잡함과 불쾌감이 표출됐는데, 한 대표는 22일 원론적인 입장만 밝힌 채 측근 그룹과 만나며 향후 대책을 숙고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완고(頑固)함이 재확인된 만큼 기존처럼 민심을 외치며 변화를 촉구하는 것만으로는 성과를 내기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김건희 여사 특검법 추진을 외치기에도 당내 기반이 미약해 힘을 받기 힘들어 '딜레마'가 더 깊어지고 있다.
尹, 韓 요구 거부하면서 당 '질책'…만찬은 '따로' 부른 원내대표와
대통령실 관계자는 22일 브리핑을 통해 전날 회동에서 김 여사 문제와 관련해 한동훈 대표가 요구한 조치 사항에 대한 윤 대통령의 답변을 공개했다.먼저, 윤 대통령은 김 여사 대외활동 중단 요구에 대해 "김 여사도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며 "전직 영부인 관례에 근거해 활동도 많이 줄였는데, 그것도 과하다고 하니 이제 더 자제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대통령실 인적 쇄신 요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얘기해줘야 조치를 할 수 있지 않나"라며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에게 알려주면 잘 판단해 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또 김 여사 의혹 규명 협조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얘기하지 말고 구체화해서 가져와달라"고 말했다. 특별감찰관 임명과 관련해서는 "여야가 협의할 문제"라며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친한계에서는 한 대표의 요구가 수용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여사 대외활동 중단 요구는 '더 자제하겠다'는 말로, 인적쇄신 요구나 의혹 규명 협조 요구는 '더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거부됐다는 인식이다.
오히려, 윤 대통령은 "어처구니없는 의혹에 대해선 대응을 제대로 하고 싶어도 대통령실이 계속 싸우는 게 맞느냐"며 "말이 안 되는 공격을 하면 당에서도 적극적으로 같이 공격을 해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야권의 각종 의혹 제기에 여당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질책성' 발언으로 읽힌다.
동시에 윤 대통령은 야당이 추진하는 김 여사 특검법과 관련해 "우리 의원들이 헌정을 유린하는 야당과 같은 입장을 취할 경우 나로서도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우리당 의원들을 믿는다"고 말하며, 여당 내 '이탈표' 움직임을 단속했다.
면담에서 드러난 윤 대통령의 여러 행동도 한 대표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친한계에서는 '푸대접'이라는 날선 반응이 나왔다. 먼저, 한 대표는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고도 윤 대통령의 외교 일정을 이유로 25분동안 외부에 서서 대기해야 했다.
이 밖에도 윤 대통령은 긴 직사각형 테이블에서 한동훈 대표를 비스듬히 바라보게 앉았고, 정진석 비서실장을 한 대표 옆에 밀착시켰다.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놓고 훈시하는 듯한 느낌(김종혁 최고위원, 22일 SBS라디오)"이라는 말이 나왔다. 윤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의 회동 때와는 달리 펜이나 메모지도 준비하지 않았다.
심지어 윤 대통령은 면담이 끝나고 만찬을 할 때 한 대표가 아닌 추경호 원내대표를 초청했다. 추 원내대표는 "대통령께서는 필요할 때 우리 의원들에게 불시에 연락하시며 가벼운 자리를 갖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윤 대통령이 제안 한 달 만에 실현된 원외 당대표와의 회동은 '빨리' 끝내고, 원내 의원들은 '수시로' 챙기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누가 위에 있고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려 한 것 같다"며 "빈손으로 떠난 한 대표 입장에서는 굴욕적이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한 대표를 아직도 검사 후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김 여사 언급 없이 대응책 고심…韓 "상황 엄중하게 봐"
면담 다음날 한 대표의 첫 공식 반응은 원론적 수준에 머물렀다. 한 대표는 이날 인천 강화 풍물시장을 방문한 뒤 기자들에게 "오직 국민만 보고 민심을 따라서 피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면담 직전처럼 김 여사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고, 꾸준히 언급해오던 '민심'만 재차 강조한 것이다.또 향후 대응 방안을 고심 중인 한 대표는 이날 친한계 의원 20여명과 긴급 만찬을 갖고, 다음날 오전에는 확대당직자회의를 예고하는 등 측근 그룹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정확한 방침을 정할 방침이다.
만찬에 참석한 조경태 의원은 기자들과 만나 "어제 한 대표가 윤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여러가지 상황을 심각하고 엄중하게 보고 있다고 했다"며 "향후 정국에 대해 '엄중함'을 공유했다"고 했다. 박정훈 의원도 "면담 이야기를 했고, 당이 앞으로 나갈 방향에 대해 서로 의견을 공유했다"며 "걱정스러운 부분들과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될지는 점점 더 논의해보자고 했다"고 전했다.
친한계에서는 한 대표가 계속해서 김 여사 문제에 대해 민심에 부합하는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한 대표가 최소한의 조치라고 언급했던 내용도 수용되지 않을 만큼 인식의 '괴리'가 드러나면서 민심을 앞세운 공개 요구만으로는 대통령실의 '쇄신'을 이끌기 힘들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한 대표가 다음 단계로 김 여사 특검법을 주도하기도 쉽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세번째 김 여사 특검법은 친한계에서도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기에 한 대표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체적으로 특검을 추진하는 방안도 친윤계 등 당 내부 설득을 자신할 수 없고, 보수 분열만 키울 수 있어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권 관계자는 "보수 세력이 공유하고 있는 '탄핵 트라우마'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며 "김 여사 특검이 이뤄지면 탄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수층의 걱정이 큰데 한 대표가 이를 주도할 경우, '배신자' 프레임이 씌워져 분열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친윤 중진인 권성동 의원도 이날 TV조선에서 "마치 이걸(김건희 특검법) 지렛대로 삼아서 요구 사항을 관철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압박을 가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지 않다"며 "만에 하나 김건희 특검법이 통과된다면 당정 관계는 '파멸'로 가는 것이고 한 대표의 '리더십'과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