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의 전쟁'으로 번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 영풍·MBK 연합에 맞서는 최윤범 회장의 반격이 본격화하고 있다. 경영권 방어의 마지막 변수로 떠오른 자사주 매입이 가능해지면서 그간의 수세를 공세로 전환할 길이 열려서다. 자사주 공개매수에 투입하기로 한 자금만 2조7000억원에 이른다.
다만 싸움의 승자를 단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영풍·MBK가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에 추가 가처분을 신청하며 제동에 나섰고, 배임과 시세조종 등 불법행위까지 주장하는 터라 향후 분쟁의 불씨는 여전하다는 관측이다.
고려아연, 자사주 매수로 반격 방아쇠
고려아연은 2일 이사회를 열고 공개매수를 통한 자사주 취득 안건을 의결했다. 앞서 영풍·MBK가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의 자사주 취득을 금지해달라'며 낸 가처분 신청을 이날 법원이 기각하자 곧장 경영권 방어에 나선 것이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자사주 공개매수를 발표하는 건 한국 자본시장 역사에서 고려아연이 처음이라고 한다.고려아연은 자사주 공개매수 가격을 주당 83만원으로 책정했다. 영풍·MBK가 진행중인 공개매수 가격(주당 75만원) 보다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함으로써 영풍·MBK의 공개매수 참여율을 떨어뜨리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고려아연 지분은 최 회장 측이 33.99%, 영풍·MBK 측이 33.13%로 비슷하다. 업계에서는 고려아연이 공개매수로 7% 안팎의 자사주를 매입하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현재 영풍·MBK는 약 2조2000억원을 투입해 고려아연 지분 최소 6.9%를 확보한다는 계획인데, 최 회장 측의 자사주 매입이 늘어나면 그만큼 영풍·MBK가 가져갈 수 있는 지분은 줄어든다. 이날 고려아연이 설정한 지분 확보 목표는 최소 5.87%, 최대 15.5%다.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는 오는 4일부터 23일까지다. 공개매수에 투입하기로 한 금액은 2조6634억원이다. 공개매수는 베인캐피탈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매입한 자사주는 전량 소각할 예정이다. 영풍·MBK는 고려아연에 맞서 다시 공개매수가를 인상할 수 있다. 공개매수 조건을 변경하면 그날부터 공개매수 마감 기간은 10일 늘어난다.
영풍정밀 대항 공개매수로 압박 수위↑
고려아연의 반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자사주 공개매수 이외에 대항 공개매수 카드도 꺼내들었다. 최 회장 측은 2일부터 1181억원을 투입해 영풍정밀에 대한 대항 공개매수에 나섰다. 공개매수 가격은 영풍·MBK가 제시한 주당 2만5000원보다 5000원 높은 3만원이다. 공개매수 기간은 이달 21일까지다.영풍정밀은 고려아연 지분 1.85%를 보유하고 있어 이번 경영권 분쟁의 격전지로 꼽힌다. 영풍·MBK가 영풍정밀 경영권을 확보하면 최 회장 입장에서는 고려아연 의결권을 사실상 3.7% 넘겨주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자사주 매입에 영풍정밀 대항 공개매수까지 최 회장의 반격이 '투트랙'으로 진행되는 양상이다.
영풍·MBK "자사주 매입은 배임" 맞불
최 회장 측이 꺼낸 회심의 반격에도 영풍·MBK는 물러날 기미가 없다. 영풍·MBK는 오히려 '고려아연의 공개매수 절차를 중지해달라'며 추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고, 자사주 공개매수에 찬성 결의한 고려아연 이사들을 형사 고소했다. 고려아연의 자사주 매입이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배임 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다.영풍·MBK 측은 "자사주는 취득 후 6개월이 지나야 처분할 수 있기에 공개매수 종료 후 주가는 이전 시세인 주당 약 55만원으로 회귀할 경향이 크다"며 "고려아연이 현재 공개매수가인 75만원보다 높은 가격인 약 80만원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면 취득한 주식 가치는 최소 40% 이상 떨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공개매수 프리미엄으로 실질 가치보다 높게 형성된 가격으로 자기주식을 취득하는 건 이사의 선관주의 의무와 충실 의무 위반은 물론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며 "소각을 위한 자사주 매입도 공개매수 후 이전 주가로 회귀했을 때 시세의 일정한 범위에서 증권사가 적은 수량을 매수해 시장 영향을 최소화하는 게 정상"이라고 강조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소각되는 자기주식 취득가격만큼 자기자본이 감소한다. 고려아연이 주당 83만원에 자사주를 매수해 소각하면 공개매수 기간 이후 예전 시세로 같은 수량의 자기주식을 소각하는 경우보다 자기자본 감소분이 증가한다. 이는 결국 부채비율에 악영향을 주고, 미래 주주의 배당 재원을 줄인다는 게 영풍·MBK 측 설명이다.
고려아연은 영풍·MBK의 이같은 주장에 선을 그었다. 최 회장은 2일 기자회견에서 "법원이 적대적 M&A(인수·합병)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자사주를 취득하는 건 적법한 대응이라고 확인해줬다"며 "MBK와 영풍이 새로운 가처분을 제기한다는 건 법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잘못된 주장으로 시장의 혼란을 초래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MBK와 영풍이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빼앗는 경우 고려아연의 미래는 없다"며 "자사주 공개매수로 회사를 적대적이고 약탈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기업가치와 주주가치를 제고함으로써 금번 사태로 초래된 자본시장의 혼란과 회사의 불확실성을 신속하게 수습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