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은 독립항쟁 동지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⑦]

이용익. 이양재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④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⑤동기동창이자 절친 함태영 목사
⑥황성기독교청년회 최대 후원자 민영환
⑦대를 이은 독립항쟁 동지
(계속)

이용익(1854~1907)은 이준 열사의 강력한 동지였다. 이용익은 이준과 같은 전주이씨 완풍대군 이원계(1330~1388)의 자손으로 고향도 같은 함경도이다. 둘은 헤이그 특사 파견과 관련이 깊다.
 
이용익은 한때 보부상으로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된다. 재화를 얻게 되자 큰 뜻을 품고 한성에 올라와 민영익의 집에 기거하면서 금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비와 민영익 사이를 발빠르게 오가며 비밀연락을 담당해 후일 민영익의 천거로 출세의 길에 오른다. 단천 감역(監役)에 제수되어 금광을 관리하면서 이재(理財)의 능력을 인정받아 1897년 내장원경(內藏院卿)에 발탁된다. 왕실재정을 맡아 궁내부 소속의 삼포(蔘圃)와 광산을 엄중 관리하여 왕실수입을 늘렸다.
 
이용익은 강직하고 청렴하며 식견이 탁월하여 고종의 신임을 받아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서북철도국총재와 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한다. 그는 축적한 부를 자신의 영달에 쓰지 않고, 이준이 설립한 '보광학교'(1904년)에 뒤이어 '보성학교'(1905년, 현 고려대의 전신) 등 여러 학교를 세운다.
 
당시 '보성학교'는 '보광학교' '보창학교'(1905년, 이동휘 설립)와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로 불리운다. 또한 그는 편집소(출판사) 보성관(普成館)과 인쇄소 보성사(普成社) 등을 설치해 민족계몽에 기여하는데, 후일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것도 여기 보성사이다.
 
이용익은 1905년 보성학교 설립후 11월 을사늑약을 반대하여 투옥되었고, 석방후 러시아로 망명한다. 그는 러시아 공사 이범진(1852~1911)과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함께 가기로 모의하지만, 1907년 2월 24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살되면서 기도는 무산된다.
 
이용익의 피살에 따라 특사는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으로 조정되고, 그의 손자 이종호(1885~1932)는 그의 뒤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제2대 교주가 된다. 이종호는 1907년 1월에 이준, 이동휘 등 함경도의 유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조직하며, 이어 이 학회에 속성사범과를 설치하여 소학교 교원을 양성한다.
 
그러나 1910년 12월 일제가 소위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서북지역 개신교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자, 이종호는 이듬해 이른 봄에 이갑과 함께 중국 청도로 망명해 안창호 유동열 등과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한다.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 김립 김도여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해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이 권업회에 이준의 아들 이용도 한때 소속되어 독립항쟁에 들어간다. 이용익과 이종호 부자, 이준과 이용 부자, 대를 이은 독립항쟁의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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