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경제인 연합회(전경련)는 1961년 삼성 이병철 당시 회장이 대기업들을 모아 출범시킨 '한국 경제인 협회'가 모태이다.
자유 시장경제 창달 등을 설립 목적으로 내걸었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권을 상대로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해줄 창구가 필요했던 게 더 큰 이유였다.
재벌 기업 회장들의 모임으로 재계 단체 맏형 노릇을 하던 전경련은 2017년 최순실 게이트 국정 농단 사태 때 뇌물창구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해체 위기를 맞는다.
LG를 시작으로 삼성, 현대자동차그룹, SK가 잇따라 탈퇴했다.
국정농단의 한 축이었다는 오명을 안고 문재인 정권 내내 유명무실했던 전경련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지난해 2월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가 회장 직무대행 자리를 맡으면서부터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정책실장과 교육부총리를 맡았던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지만 야당의 반발에 부딪쳐 낙마했고, 2018년에는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는다.
지난 대선에선 윤석열 당시 후보의 정치 멘토로 상임 선대위원장을, 윤 후보 당선 이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지역균형특별위원장을 맡았다.
보수와 진보 정권을 오가는 파격적인 정치 이력을 가진 김 전 부총리가 주로 기업인들이 맡아오던 전경련 회장 직무 대행을 맡은 것부터 이례적이었다.
6개월 동안 만 직무 대행을 맡아 전경련을 정상화시킨 뒤 물러나겠다던 김병준 전 부총리는 이후 전경련에서 이름만 바꾼 한국 경제인 협회(한경협) 상근 고문을 맡아 지금까지 그 직을 유지하고 있다.
상근 고문을 맡아 전경련 혁신을 위한 사업들을 돕겠다고 했지만 이 때부터 용산 대통령실의 위세를 등에 업은 김 고문이 신임 회장을 제치고 사실상 수렴청정할 거란 말들이 나돌았다.
그런 김병준 전 부총리를 향해 26일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위원장은 고문직에서 물러날 것을 사실상 대놓고 요구했다.
한국 경제인 협회(한경협·옛 전경련)에 회원사로서 회비를 낼 지 여부를 놓고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26일 회의를 가졌는데, 이찬희 위원장은 회의에 앞서 "정경유착의 고리는 정치 권력의 전리품이 돼서는 안 되고, 정경유착의 근본을 끊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며 김병준 고문의 사퇴를 압박했다.
"최고 권력자와 가깝다고 평가받는 분이 경제인 단체 회장 직무대행을 했다는 것도 이상할 뿐만 아니라 임기 후에도 계속 남아서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한경협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의지가 있는지 근본적으로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도 말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독립적으로 계열사의 준법의무 위반을 감시·통제한다고는 하지만 삼성 그룹 입장에선 대단히 부담스러워 보이는 발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끝난 뒤 회의 결과는 이 위원장의 발언 수위와는 사뭇 달랐다.
'정경유착 시 즉시 탈퇴'란 조건을 달긴 했지만 회비 납부여부를 '계열사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긴다'는 것으로 사실상 회비 납부를 승인한다는 결정이었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가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쳐 결정을 내렸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어떤 고민이었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윤석열 정부 출범에 기여했고 지금도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인사를 향해 사퇴를 계속 요구하는 게 대기업으로선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전경련을 정상화 시키고 혁신시키겠다던 김병준 고문은 스스로 혁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김 전 부총리가 고문 직 지키기를 고수한다면 국정농단 사태 이후 어렵게 자정 과정을 거쳐온 재계에 나쁜 선례로 남게 될 것이다.
정치권의 풍향이 바뀔 때마다 매번 새로운 인물이 정권의 힘을 업고 한경협 상근고문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는 나쁜 관행 말이다.
그렇게 되면 한경협 상근고문 자리는 권력의 전리품으로 전락해 새 정권과 대기업 간 정경유착의 통로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전경련 혁신은 기업인들에게 맡기고 정치인 김병준은 스스로 고문직에서 물러나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