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틀에서 스스로가 팩트(fact·사실)를 다루는 스토리텔러라고 여긴다. 올 2월 정부의 의대증원 발표로 촉발된 일련의 사태에 그야말로 '멱살을 잡힌' 부처 출입기자의 최대 화두는 (어느덧 하나의 '용어'가 된) 의료공백이다. 삭막한 현실을 잠시 탈피하려 드라마 클립을 찾았더니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리스트마저 <낭만닥터 김사부>(2016), <슬기로운 의사생활>(2020)이다. '아뿔싸' 싶다가 문득 이 작품들의 무대가 전공의들이 수련 받는 상급종합병원이란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분초를 다투는 응급실에서부터 병실이 '집'이 된 중증환자에 이르기까지 생로병사 속 희로애락이 공존하는 상급병원은 늘 에피소드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상기 드라마들이 시즌제로 장기간 사랑받은 이유와도 통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사 '10명 중 4명' 꼴인 젊은 전공의들이 이탈한 지 반 년째인 현장에선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는 아우성만 들린다. 원로 정치인조차 '응급실 뺑뺑이' 경험을 공개 토로하는 상황에서 환자와 의사 간 정담은 완벽히 실종됐다.
"(응급)중증진료 기능이 기반부터 무너지고 있는데 경증환자를 줄여 이걸 만회해 보겠다는 게 의미가 있겠어요? 그나마 사태 초기엔 일부 병원들이 중증환자를 나눠 맡으려 했지만 지금은 병원 내부 의료진 갈등, 배후 진료과 역량 부족 등으로 거의 중단됐어요. 상당수 중증환자가 '수용 불가' 상태로 이송병원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겁니다. 응급환자 수용은 (의·정 갈등) 이전부터 심각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붕괴 직전입니다.
(정부는) 전공의 부족 문제 풀겠다고 '전문의 중심 병원'이란 말을 쓰는데, 그렇게 운영하겠다는 기관들부터 당장 전문의들이 '줄사직'하고 있어요. 응급실 파행은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입니다." 오늘도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전문의의 전언이다.
정부는 의료개혁 구상 단계에서 현재와 같은 시나리오를 염두에 뒀을까. 약 1년 전 "생명과 지역을 살리겠다"던 약속이 무색하게, 중증·응급 진료는 정부가 의대 증원분(分)의 8할을 몰아준 지방 대학병원부터 흔들리는 중이다.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의료혁신의 목적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며 필수의료 혁신전략을 발표한 곳이 이후 최대 증원 폭(의대 정원 49명→200명)을 배정한 충북대였다는 점은 거대한 아이러니다.
정부의 '믿는 구석'이었던 국민들도 지쳐 가는 중이다.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녹소연)가 지난 23일 국회 토론회에서 공개한 의료소비자 설문조사 결과(7월 8~17일, 총 608명 대상)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66%는 의대 증원에 찬성했지만, 절반 가까이(42.4%)가 '2천 명 증원의 과학적 근거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정사태 대응방식에 있어서도, 보건복지부의 태도를 마뜩치 않게 여기는 여론이 47.2%에 달했다. '의료계 집단행동' 반대가 약 70%로 다소 더 높았지만, 적지 않은 비율이다. 정부 대응을 옹호한다는 답은 19.1%에 그쳤다. 의대 2천 증원을 이유 있는 뚝심이라기보다 '불통(不通)'으로 인식하고 있는 셈인데, 당초 국민 대다수가 의사 증원 자체엔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점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 같은 변화는 '복지부가 보건의료 정책을 수립할 때 국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전체 과반(51.5%, '전혀 그렇지 않다' 16.1%·'그렇지 않은 편' 35.4%)이 고개를 저은 데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당일 이 조사결과를 토대로 발제에 나선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녹소연 이사)는 정부의 의료개혁 정책이 되레 의료소비자를 소외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최근 응급실 과밀화 해소를 위해 '경증환자의 본인부담률 인상(현 50~60%→90%)' 대책을 내놓은 것과 관련, "15.5%의 국민은 '응급상황이 생겼을 때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판단 불가'라고 한다. 내가 아플 때 경증인지 중증인지 모른다는 얘기"라며 "이 15%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제시되지 않았다. 소비자 관점에서 정책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앞서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가 공모한 '국민과 환자가 원하는 개선된 의료서비스의 모습' 응모안 60편을 들어 의료개혁의 최우선 목표는 △의료기관에 가지 않고도 자기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지역사회 △필요시 전 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불편없이 의료서비스를 이용 가능한 사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형병원의 지속가능한 구조 이상으로 중요한 과제는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동네 병·의원(1차 의료)의 강화, 질병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는 예방적 의료시스템, 의사 외 간호사 등 여러 전문가가 협업하는 통합적 의료·돌봄체계라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복지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패키지가 차질 없이 추진되면 과연 현재 의료소비자가 경험하는 불편을 해결할 수 있겠나"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대국민 브리핑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뢰를 주지 못한 데엔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꼬집었다.
"혹시 (의료개혁이 완수되면) 병원에 간 환자들은 '핑퐁 게임'을 하게 되고, 의료사고 수습은 불가능해지고, (의사 없이) 진료지원(PA) 간호사만 처치를 하는 병원이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요? 지역·필수의료는 붕괴하고 (의대 증원 전보다) 의료서비스 질은 떨어져 '엉터리 의사'가 진료하는 환경이 되는 건 아닌지…정부는 개혁이 개악(改惡)이 되지 않을 거란 확신을 국민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향후 더 나은 의료를 위해 더 많은 건강보험료를 걷어야 한다면, 이 역시 납부 주체인 소비자들과 논의해야 할 사안이란 점도 덧붙였다. 회의에 초대된 몇몇 인사들을 만나고 '하고 싶은 말'만 담은 보도자료를 뿌리는 것은 "의료소비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것이다. 개혁의 동반자여야 할 공급자(의료계)와 반목하고, 소비자(국민)로부터는 외면 받는 정부가 뼈아프게 되새겨야 할 조언이다.
"정부 정책은 수요자와 공급자, 시장경제 원리 간에 균형이 필요합니다. 문제 해결방안을 현실 상황에서 단계적·점진적으로 찾아야 하고, 그 내용은 국민들이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도록 디테일해야 해요. 정부는 우아한 회의실이 아니라, 실질적 현장을 다니면서 의료소비자의 이야기를 경청하십시오."(이주열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