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료와 지방의료 확충'은 제 평생의 명제였고, (거의) 모든 의사는 이에 찬성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방법으론 해결되지 않습니다(…) 2천 명이란 숫자가 의료개혁을 완전히 잡아먹은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장내과 전문의인 배장환 전 충북대병원·의대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6일 국회 교육위원회·보건복지위원회 '의대 교육점검 연석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이 같이 말했다.
청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배 전 교수는 충북대 의대에서 의과 교육을 받고 모교 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마쳐 '지역 필수의료'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올 2월 정부가 '의대 2천 명 증원'을 발표하자 의료전달체계 개선이 최우선 과제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고, 지난달 결국 사직했다.
배 전 교수는 현 정부 '의료개혁'의 상징이 된 의대 증원을 가리켜 "모든 과정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당장 몇 달 후 배가 될 신입생을 가르칠 교수 확충은 고사하고, '있는 사람'도 나가는 판에 누가 이 과업을 자처하겠냐는 것이다.
의·정(醫政) 갈등은 이제 일시적 현상을 넘어 '디폴트'(기본값)로 굳어져 가고 있다. 전공이 이탈이 19일로 만 6개월째에 접어든 가운데 하반기 전공의 추가 모집은 사실상 빈손으로 끝났다. 텅 빈 의대 강의실도 연내 변화를 기대하긴 어려워졌다.
현장에선 미래의 전문의인 신규의사 수급조차 끊기게 된 상황에서 취약지의 '필수의료 인력 부족'을 해소하겠다는 청사진은 허구일 뿐이라는 자조가 나온다. 설상가상 교육부가 의대 증원분의 8할 이상을 몰아준 배정심사위원회(배정위) 회의록을 파기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졸속추진' 논란은 사태 초기보다 더 확산되고 있다.
빅5 등 추가모집 '빈손'…정부, 전공의 부재 상쇄대책 없어
보건당국과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 16일 접수가 마감된 하반기 2~4년차 레지던트 및 인턴 모집은 지원자가 극소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빅5' 등 주요 수련병원의 최종 지원자는 앞서 14일 접수를 마친 1년차 레지던트 수를 합쳐도 0명 또는 한 자릿수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말일까지 1차 모집한 전공의가 전체 정원(TO) 대비 1.4%(7645명 중 104명)에 그치자, 당초 '추가 (복귀)대책은 없다'던 정부는 이내 말을 바꿔 추가 충원에 나섰다. 당시 내세운 명분은 "환자를 위해선 단 한 명의 전공의라도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였지만, 실익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경북대병원과 전남대병원, 충북대병원 등 지역의료를 책임지는 대학병원들도 대체로 비슷한 사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나마도 하반기 모집을 계기로 수련을 이어가기로 한 전공의 80%는 서울 등 수도권 병원을 택했다. 국회 복지위 소속 서명옥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하반기 전공의 1차모집 시 레지던트에 지원한 91명 중 비수도권 병원 지원자는 19명에 불과했다. 지방 의대에 증원분 82%를 집중 배정한 정부의 의도와 배치되는 결과다.
정부는 모집상황을 토대로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전공의 부재를 상쇄할 '뾰족한 수'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규홍 복지장관도 국회 연석 청문회 당시 "세브란스, 아산병원 등에 (하반기 전공의 추가모집) 지원이 한 명도 없다고 하더라. 어떻게 할 건가"란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질의에 "우선 복귀할 수 있도록 최대한 설득을 (하겠다)"며 원론적 답변만을 되풀이했다.
일부 수련병원은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밟지 않은 일반의(전담의)라도 뽑겠다는 방침이나, '개원가 러시(rush)' 중인 사직 전공의의 지원 수요는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사직한 전공의 상당수는 전날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열린 내과 초음파 연수강좌 수강 등 재취업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12일 기준 레지던트 사직자 971명이 의료기관에 취업한 것으로 파악됐다.
새 학기가 코앞인 40개 의대의 교육 정상화도 요원하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의대 재학생 1만 8217명 중 실제 출석 중인 학생은 2.7%인 495명 정도다.
배정委 회의록 파기의혹에 '졸속추진' 논란만 과열
이에 더해 '증원 추진 과정의 정당성' 논란은 한층 더 과열되고 있다.
애초에 교육위·복지위가 16일 의대증원 관련 청문회를 공동 개최한 것도 앞서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가 '의대 2천 증원 정책의 진실을 규명해 달라'며 국정조사를 요청한 국민동의청원이 상임위 회부 기준인 5만 명을 조기 돌파했기 때문이다.
의대 교수들은 2천 증원이 협의·근거·준비 없는 '3무(無) 정책'이라고 비판해 왔다. 이번에 교육당국이 증원분 배정을 결정한 배정위 회의록을 파기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졸속 추진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나흘간 세 번의 회의만을 가진 뒤 2천 명을 전국 의대에 어떻게 배정할지 결정한 배정위는 위원 구성과 논의과정 등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왔다.
그런데 교육부는 전체 회의기록을 요청한 국회에 이미 공개된 10여 쪽짜리 요약자료만 제출한 데 이어 회의 진행 중 제공자료 중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은 폐기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오석환 차관이 파기 문서를 두고 '협의 내용'이라 했다가 '참고자료'로 말을 번복하면서, "(자료를) 줄 듯 말 듯하며 국회를 우롱했느냐"(김영호 교육위원장) 등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고민정 민주당 의원은 "현장 점검은 하나도 하지 않고 책상 위에 앉아 자료만 갖고 판단한 것인데 이런 졸속과 날림이 없다"며 배정위가 증원신청 의대의 교육역량을 평가한 데 대해 "거의 관심법 수준"이라고 비꼬았다.
그간 의료계 일각에선 의사 증원의 당위성에는 동의하면서도 증원규모 산출근거 부족, 의정 협의 부재 등을 문제 삼아왔다. 정부가 정책 불신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은 현 상황을 '차량운전 시 접촉사고'에 빗대 "(의대 증원은) 사회적 관심이 매우 높고 국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인데 (현장 보존을 하지 않고) 파쇄 후 아무런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해당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뢰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나"라고 지적했다.
배장환 전 교수는 "국회와 정부가 내년에 닥칠 의료대란에 대해선 정말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내년엔 한국전쟁에서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 벌어질 것"이라며 "(신규)의사가 없으면 연쇄적으로 전문의, 전임의가 없어지고 (의대)교수도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는 증원 의대의 교육 질 부실화 우려와 관련, 지원 예산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선 의료개혁특위 논의를 바탕으로 내달 초 의료개혁 1차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