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가 선거 공약으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폐지하겠다고 한 것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통화정책 결정권을 맡기는 게 맞는 가란 학계의 오래된 논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트럼프 후보의 경제 브레인들은 연준이 금리를 결정할 때 대통령에게 사전에 의견을 구하고 협의토록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선출되지 않은 경제·금융전문가 그룹이 통화정책 결정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이다.
국내에서도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여당의 한 후보가 금리결정을 아예 여당이 주도하겠다는 주장을 폈다.
원희룡 후보는 "금리를 낮추기 위해 당이 논의를 주도하겠다"고 말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관련한 이슈이다.
1950년 제정된 한국은행법은 정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고 한국은행의 독립을 명시했지만 1960년대 초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성장위주의 일사불란한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은행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렇게 위축됐던 한국은행의 독립성은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면서 함께 부각했다. 정치권력이나 정부의 입김을 지칭하는 '관치금융'이란 말은 청산돼야할 권위주의 잔재로 여겨졌다.
관치금융의 폐해를 청산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결국 1997년 한국 은행법 개정을 통해 한은의 중립성 보장이 강화됐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정치권력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통화정책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최근 공교롭게도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정치권력으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위축시키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11일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3.50% 현 수준에서 동결했다.
지난해 2월부터 1년 6개월 연속 동결 행진이다.
송언석 국민의힘 재정·세제개편특위 위원장에 이어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한덕수 총리까지 가세해 선제적인 금리 인하를 압박했지만 한은은 일단 동결을 고수했다.
이창용 한은총재는 정부와의 정책 공조도 중요하다며 금리인하를 압박하는 정부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뜻도 내비쳤다.
금리 인하에 대해선 '차선을 바꾸고 방향 전환을 할 준비를 하는 상황이 조성됐다'면서도 '수도권 집값 상승 속도 생각보다 빠르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로 가계대출이 지난 6월 한달 동안 6조원 늘어났다.
은행 주택담보대출이 상반기 통틀어 26조 폭증했고 6월 한달에만 6조3천억원 늘어난 영향이 컸다.
서울지역 아파트 실거래 가격 상승폭이 최근 몇 달새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 역시 9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가계대출의 상방압력이 높아진 것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총부채 원리금 상환비율(DSR)에도 적용되지 않고 금리도 최저 1%대인 신생아 특례대출이 올 상반기에만 6조원 가까이 풀려나갔다,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선제적 금리 인하를 단행하기엔 가계대출과 부동산 시장의 동요가 심상치 않다.
한은은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집요한 금리 인하 압박 속에서 집값 안정과 가계부채 관리, 그리고 한계에 직면한 자영업자와 영끌족 지원이란 상호 모순되는 변수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은이 지금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선출된 정치 권력은 언제나 대출 규제 강화라든가 구조조정을 통한 부실 부동산PF 정리같은 인기없는 정책 대신 금리를 내려 집값을 부양해주고 부동산PF들을 회생시키는 선택을 하기 쉽다는 점이다.
정치 권력으로부터 중앙은행 독립성을 보장해온 건 지금같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는 지 모른다.
한은의 통화정책이 정치적 외생변수에 흔들리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