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비단 청주만의 문제나 백로만의 문제도 아니다. 멧돼지, 고라니, 황조롱이, 너구리 등 자연에 사는 수많은 야생동물과 인간이 만나는 곳에서 이러한 충돌은 매일같이 벌어진다.
지난해 발간된 한국도시지리학회지 제26권 1호 '도시의 비인간 이웃: 대전시 주민-백로 갈등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경기 고양시, 대전 유성구와 서구, 충북 청주시 서원대 인근 등 국내 주요 백로 서식지 중 일부에서 토지 매매, 소음과 악취 등을 이유로 벌목과 간벌이 이뤄졌다. 지자체에서 백로와의 '공존'을 시도하며 대체 서식지 조성에 나섰으나 주민들의 민원으로 백로들이 갈 곳을 잃은 것이다.
백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거주지와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겹칠 때 야생동물은 '유해 동물'로 지정되고, 인간의 필요로 서식지 자체가 제거되기도 한다. 과연 야생동물과 인간이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지금 시대 '공존'이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 것이며, 자연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동물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란 무엇일까.
인간과 야생동물의 공존을 고민한 영화 '생츄어리'의 왕민철 감독과 국내 1호 거점동물원인 청주동물원 김정호 진료사육팀장, 사육곰 생츄어리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최태규 활동가(수의사)와 함께 '공존'의 의미와 해법을 모색해 봤다.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
영화 '생츄어리'는 동물원 밖, 야생의 동물들이 어떻게 동물원으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이 경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공존'의 의미와 생츄어리(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야생동물을 위한 보호 시설)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의 최태규 활동가는 '동물권'에 앞서 "동물들이 삶의 질이 어떠한가.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동물들에 대해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이야기가 좀 더 나오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죽음이나 학대 여부만이 동물의 권리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현실이 오히려 동물권이나 동물 복지에 관한 논의를 축소할 수 우려가 담겨 있다. 최 활동가는 "죽이지 않는다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동물이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느냐를 중심에 놓고 보는 게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우리가 동물에게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느냐 결정할 때 동물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는 게 동물 윤리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 아닐까"라고 설명했다.
청주동물원에 변화가 생긴 것은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부경동물원에서 청주동물원으로 거처를 옮긴 일명 '갈비 사자' 바람이의 사례 역시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증명한다.
김정호 팀장은 "우리가 노령 사자인 바람이를 열악한 환경에서 데려오고, 구조센터에서 안락사 대상인 장애 동물들을 데려온다. 그런데 우리 관람객이나 유튜브, SNS 댓글을 보면 변화가 보인다"라며 "장애 동물을 데려온 것을 두고 한 장애인은 고맙다고 전화하셨고, 바람이를 데려왔을 때 한 장년층은 유튜브에 댓글로 공감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런 스토리를 준다는 게 가장 유익한 일인 거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동물원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얼마나 많은 동물을 구할 수 있겠나.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역할이 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청주동물원의 변화를 수년에 걸쳐 카메라에 담아낸 왕민철 감독은 "'동물, 원'을 처음 찍을 때와 지금의 청주동물원을 보면 완전히 다른 동물원이라 할 수 있어서 기쁘다"라며 "청주동물원은 거점동물원으로서 하는 일들이 잘 되고,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역시 생츄어리 부지를 얻게 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동물과의 '공존', 인간의 최소한의 '책임'
청주동물원의 변화는 최소한의 공존과 책임을 모색한 결과다. 동물권과 동물복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점차 개선되고 있고, 그 결과 청주동물원 역시 동물 중심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관계자들은 '동물권'과 '공존'을 거창한 담론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최소한의 책임과 실천으로 바라보려는 인식 또한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태규 활동가는 "공존이라는 말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늘 동물들과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떻게 공존하느냐의 문제"라며 "생츄어리 역시 야생에 있던 동물들이 어떻게 다뤄졌는지 보고, 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 보고 반성하자는 의미에서 할 일이 있는 거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왕민철 감독은 "어떻게 보면 '공존'이라는 말을 쓰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최소한 생존은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사실 생츄어리가 문제가 아니라 서식지를 신경 써야 하는데, 서식지를 신경 쓰기엔 너무 멀고 감도 안 오니까 어쨌든 안에 있는 동물을 어떻게 해보자고 논의하고 있다. 생츄어리 논의를 넘어서서 서식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라고 짚었다.
인간으로 인해 살 곳을 잃고, 다친 비인간 이웃과 함께 하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다.
왕 감독은 "처음 '동물, 원'을 찍을 때나 '생츄어리'를 찍을 때도 김정호 수의사님과 청주동물원에 관심을 가졌던 건 주어진 한계 안에서 어떻게 해주면 동물들이 나아질 것인지 등 자신의 한계 안에서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라며 "공존, 생태 등 거대 담론을 이야기할 게 아니라 갖춰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장 내 앞에 주어진 일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그게 직업 윤리일 수도 있고 동물 윤리일 수도 있는 것"이라며 "주어진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대부분 야생동물은 보호해야 하는데 뭘 해줘야 할지 모른다고 하는 분이 많다"라며 "농수로에 계단을 만들어주는 것을 보고 관계자들이 바꿀 수도 있는 거다. 또 마스크를 잘못 버린 게 동물의 목에 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마스크를 제대로 버리는 것도 보호의 한 방법이다. 실생활에서 할 수 있는 걸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