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희는 '배우'로서는 신인이지만, '피아니스트'로서는 이미 세계 무대를 주름잡는 베테랑이다. 신예답지 않은 연기로 칸과 이탈리아를 사로잡은 건 바로 피아니스트라는 '예술가'로서의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유선희는 6살부터 각종 피아노 콩쿠르 입상, 12살에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두각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의 유명 피아니스트 발프리도 페라리의 초대로 이탈리아 바리에서 마스터 클래스 후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 산차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렇게 세계적인 거장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과의 만남을 계기로 이탈리아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선희의 음악 활동은 클래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재즈, 팝,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뮤지션과의 콜라보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유명 싱어송라이터인 막스 가제의 스페셜 게스트로 투어를 함께하는 등 자신의 음악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싱글 앨범 '샹들리에' 뮤직비디오는 직접 연출까지 했다. 배우 활동은 이러한 '유선희'라는 아티스트의 예술 세계를 더 넓게 확장하는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연기와 연주…표현의 예술
배우와 피아니스트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면을 가진 예술이었다. 둘 다 '표현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음악에도 '프레이징'(음악의 흐름을 유기적인 의미 내용을 갖는 자연스러운 악구로 구분하는 것)이 있듯이 연기에도 프레이징이 있었다. 다만 피아니스트는 악기로 표현해야 했지만, 연기는 목소리·말투·표정·행동 등 직접적이면서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 달랐다.
유선희는 "연기를 통해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걸 경험하고 나니 다시 연주하게 됐을 때 무대에서 내가 몸을 쓰는 게 좀 더 대범해지고 자유로워졌다"라며 "그 두 예술이 상호작용을 해서 나의 예술적인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되는 거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솔리스트로 활동하며 혼자 연습하고 혼자 무대에 서고 혼자 작업하는 게 익숙했다. 그러나 영화 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한 신,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목표를 갖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공동체 의식을 갖고 함께 일해나가는 작업"이 너무 좋았다. 자신을 비롯한 "하나의 조그만 부분이 모여서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었다는 데 대한 자부심"도 생겨났다.
배우로서 경험하는 현장은 피아니스트로 경험하는 무대와는 또 다른 재미를 한가득 안겨줬다. '찬란한 내일로' 이후 배우로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인지, 영화를 찍으면서도 오디션 제안이 계속 왔어요. 지난해 많은 작업을 했어요. 한 영화에서는 좀 더 비중 있는 악역 주인공을 연기했고요.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죠. 정말 악역의 매력이 크더라고요. 왜 다들 악역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어요. 저한테 잘 맞았어요."(웃음)
연기는 내면의 다양한 자신을 꺼내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단편영화에서는 주인공을 맡았다. 소수의 사람과 부딪히고 부대끼며 작업하는 것만의 장점도 있었다. 유선희는 "가족 같은 분위기 또한 나에겐 큰 경험"이었다고 했다.
올해는 본업인 피아니스트로서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데뷔, 여름 투어, 새 피아노 솔로 앨범 녹음 등 많은 활동이 계획돼 있는 만큼 시간을 분배해 하나의 작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난해 연기와 연주를 병행하며 힘들었던지라 올해는 전반기는 음악에 좀 더 집중한 후 가을부터 연기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유로움'을 얻는 것이 꿈"
어린 시절 이탈리아로 넘어가 지금까지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랜 시간을 타국에서 보낸 그에게는 자신만의 숙제이자 사명감이 있다. 유선희는 '찬란한 내일로'를 찍으면서 자신의 오랜 숙제를 마주했다. 바로 '정체성'이다.
그는 "사실은 내가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느끼며 산다. 그렇지만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건 속일 수 없다. 한국인의 뿌리가 상당히 깊다"라며 "그래서 클래식을 하지만, 항상 경계에 있는 걸 선택했다. 지금 음악과 영화의 세계 넘나들며 하는 것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유선희'라는 자신에 관해 '불안정'하다고 표현했다. "경계에 있다는 건 불안정하다는 것"이라며 흑과 백을 예로 들었다.
"흑이거나 백은 정말 쉬워요. 그런데 흑과 백을 넘나든다는 건 굉장히 불안정하죠. 어떤 날은 제가 조금 더 흑에, 어떤 날은 백에, 어떤 날은 중간에서 저만의 균형을 잡고 온전하게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 저의 상태가 어떨 때는 참 힘들지만, 어떨 때는 좋기도 해요. 그렇기에 제가 예술을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실 힘들지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하면서 그의 불안정은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하는 동력이 됐다. 지금도 그는 불안정하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의 불안정을 에너지 삼아 연기로, 연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해 나가고 있다. 어쩌면 불안정하기에 한 자리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티스트 유선희'의 궁극적인 바람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연주가로서 원하는 건 무대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테크닉을 비롯한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온전히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할 수 있을 때 그런 경지에 오른다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그게 굉장히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큰 경험이 필요하죠. 연기도 그런 거 같아요. 연기할 때 내가 온전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캐릭터와 온전한 일치되는 거죠. 그런 자유로움을 얻는 것, 그런 경지에 오르는 게 꿈이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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