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에 달하는 시간 동안 영화의 길을 걸어온 거장이 영화와 시대, 그리고 자신을 성찰하고 저항하고 비판할 방식으로 택한 것은 역시나 '영화'였다. 이탈리아 거장 난니 모레티 감독은 이탈리아의 햇살을 닮은 영화를 통해 비록 최악이라 불러도 될 위기라 할지라도 반짝이는 '찬란한 내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다고 노래한다.
명망 있는 영화감독 조반니(난니 모레티)는 5년 만에 새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 그러나 명작 탄생을 기대하던 제작자는 파산 직전에, 40년을 함께한 아내마저 날벼락 같은 이혼 선언으로 그를 혼란에 빠트린다. 조반니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사랑해 온 모든 것들이 위태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불행하기만 한 인생은 없다고, 찬란한 내일로 향하기 위한 유쾌한 여정은 계속된다.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난니 모레티 감독이 영화도, 일상도 위기에 처한 명망 있는 감독 조반니가 찬란한 내일로 향하기 위한 유쾌한 여정을 그린 시네마틱 인생찬가 '찬란한 내일로'로 돌아왔다.
영화는 감독의 모습을 반영한 영화감독 조반니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을 그리며 진행한다.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의 배경이기도 한 1956년은 헝가리 내에서 억압적인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고, 새로운 자유를 갈구하던 시기다.
'찬란한 내일로'는 헝가리 혁명이라는 저항의 역사를 작품 안으로 가져와 조반니와 영화라는 예술 세계, 그리고 난니 모레티 감독이라는 연출자의 저항으로 잇는다. 그렇게 시대와 정치, 사회와 영화 그리고 조반니의 삶을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성찰하고 비판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1956년대를 그린 영화 속 영화와 조반니의 삶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건 일종의 메타포다. 조반니와 조반니 아내의 모습은 스스로에 대한 메타포이자 시대에 대한 메타포이며,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조반니는 크게 영화 제작의 위기, 감독으로서의 위기, 남편으로서의 위기와 아버지로서의 위기를 동시에 겪는다. 영화 제작이 예산 문제로 위기를 맞이하자 조반니는 결국 넷플릭스와 만난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것은 기회가 아닌 현대 영화의 위기와 감독으로서의 위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넷플릭스가 주도하는 OTT 시장에서 극장과 영화에 대한 개념이 변화한 현재, 넷플릭스가 말하는 '영화'는 그간 수많은 감독이 쌓아 올린 '영화'라는 개념과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넷플릭스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역량과 예술성보다는 구독자들을 '헉'하게 만들 한 방이 필요하다.
조반니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조반니는 다시금 좌절할 수밖에 없다. 젊은 감독의 영화 현장에서 그가 그토록 열변을 토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변화한 현대 영화계와 비판 의식이 결여된 현실에 대한 헛헛한 충격 때문일 테다.
자기중심적이고 지나치게 원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반니의 모습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너무나 독단적인 모습이 답답할 수도 있고, 또 지난 수십 년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노장의 완고함은 현재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뜨끔하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에는 독단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조반니와 그의 아내의 말과 행동을 빌린 노장의 성찰 역시 담겨 있다. 조반니는 감독을 투영한 캐릭터이자 난니 모레티 감독이 직접 연기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직접 영화 안으로 들어간 난니 모레티 감독은 조반니이지 자신을 향한 아내의 말을 통해 영화적으로 자신을 성찰한다. 스쿠터가 아닌 전동킥보드를 타고 다니는 모습 역시 조반니가 단순히 자기 원칙이나 지난 시대의 방식만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선택의 결과는 다른 엔딩, 다른 내일이다. 혁명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려는 위협, 이념적인 위기, 영화 촬영이 중단될 위기, 자본 앞에 영화감독으로서의 원칙과 신념이 꺾일 위기, 반평생을 살아온 아내와의 결별이라는 위기 등 인생 최악의 위기라고 생각했던 순간 앞에서도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찬란한 내일로'는 대책 없이 낙관적일 수는 있지만, 우리에겐 찬란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렇게 낙관할 수 있는 건 아직 '내일'이 오지 않았고,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 제작자들이 조반니 영화의 의미와 그 가능성을 알아보고 제작을 결정하며 영화 촬영이 재개되는 장면은 눈길을 끈다. 한 차례 큰 위기를 겪은 조반니가 한국적인 의식이라며 소주 한 잔을 원샷 한 후 다시 찬란한 내일로 나아가는 모습은 국내 팬들에게는 여러모로 흥미롭게 다다갈 것이다.
영화 속 유머는 이탈리아 출신 난니 모레티 감독의 정서가 한껏 담겨 있어 호불호가 나뉠 수 있다. 복잡한 서사의 중첩과 뮤지컬 신 역시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코드가 맞는 사람, 또 영화의 다양한 측면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재미로 다가갈 것이다.
일단, 적어도 이 글을 쓰는 한국의 관객 한 명은 그의 영화에서 반짝임을 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찬란한 내일로'는 여전히 영화의 힘은 강력하다고, 영화가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그렇기에 영화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영화관에서 관람하길 권한다.
95분 상영, 5월 29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