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최고 지도자의 후계자로 유력한 에브라힘 라이시(63) 이란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발생한 헬기 추락사고로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다. 이란 당국이 라이시 대통령 구조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현지 악천후로 인해 수색작업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로이터통신과 BBC 등에 따르면, 라이시 대통령은 성직자이자 사법부 요직을 거친 법조인 출신의 초강경 보수파 정치인이다. 그는 이란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85)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서방세계는 검사 시절 숙청 작업을 주도한 그를 '테헤란의 도살자'라고 부른다. 라이시 대통령은 1960년 12월 이슬람 시아파의 최대 성지중 하나인 마슈하드 인근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 때 하메네이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1979년 이슬람혁명 전 팔레비 왕정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이란 이슬람혁명 2년 뒤인 1981년 스무살의 나이로 테헤란 인근 카라즈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2019년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사법부 수장에 올랐으며 검찰 재직 당시 반체제 인사 숙청 작업을 이끌었다. 국제앰네스티는 당시 약 5천명이 사형 집행된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 행정부는 라이시 사법부가 청소년 범죄에 사형을 선고·집행하고 죄수를 고문하는 등 비인간적으로 대한다는 이유로 2019년 그를 제재 대상에 올렸다. 그는 2017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하산 로하니 당시 대통령에게 져 낙선했다.
2021년 재도전해 득표율 61.9%로 개혁파와 혁명수비대 출신 후보를 꺾고 8대 이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란 정가에서는 그를 유력한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로 꼽아왔다. 지난 2021년 8월 취임 이후 근 3년간 시아파 맹주 이란의 초강경 이슬람 원리주의 노선을 이끌어왔다.
내부적으로는 지난 2022년 시작된 이른바 '히잡 시위'가 전국적인 반정부시위로 확산하는 가운데 이란 당국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릅쓰고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라이시는 가자전쟁 국면에서 이른바 '저항의 축'으로 불리는 하마스,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시리아와 이라크 내 친이란 민병대 등을 지원하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에 군사적으로 맞서왔다. 특히 지난달 이스라엘의 주시리아 영사관 피폭 이후 이스라엘 본토를 사상 처음으로 보복 공격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강경 노선을 진두지휘해온 라이시 대통령이 사망할 경우 중동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초미의 관심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고가 이란 내부에 불러올 영향이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NYT는 히잡 시위 등 반정부 봉기 및 수백만명의 지난 3월 총선 투표 보이콧이 보여준 집권 세력에 대한 불만 고조, 사상 최저치로 추락한 통화 가치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 등 미국의 제재로 인한 경제 악화 등을 불안 요소로 꼽았다.
분쟁 전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의 알리 바에즈 이란 국장은 NYT에 "라이시 대통령 사망 시 이란은 부통령이 정권을 넘겨받아 5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면서 "이 상황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통성 위기에 처해있고 역내에서 이스라엘 및 미국과 맞서고 있는 이란에 중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란 국영 TV 등이 일단 이번 헬기 사고의 원인을 '악천후'로 규정하고 있어 사고의 원인을 둘러싸고 국가 간 갈등이 불거질 여지가 높지 않다는 관측도 있다. 또 최고 지도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이란에서 대통령의 부재로 정책의 주요 방향이 틀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라이시 대통령과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이란 외무장관을 태운 헬기는 이란 북서부 디즈마르 산악 지대에 추락했다. 수색 대원들은 험한 산세, 강추위와 자욱한 안개로 수색에 난항을 겪었으며 헬기 탑승자들의 생사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