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데카르트(1596-1650)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 몇 세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고 찬양했다.
미국의 자유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도 "책을 읽음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했다.
16세기와 19세기를 살았던 이들에게 지식의 유일한 보고와 같았던 책은 가히 찬양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 유튜브와 같은 영상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먹고 살기 바쁜 시간 속에서 책은 영 맥을 못추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출판 시장이 매년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역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세계적인 흐름처럼 보인다. 그 와중에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현대 사회 속에서 생존을 위한 자기계발서와 각종 투자서는 인기다.
영화와 음악, 애니메이션, 게임, 웹툰·웹소설이 스마트폰 안에서 새로운 생태계를 공고히 하는 사이, 짧은 시간 더 많은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도록 만드는 사이, 한때 '지식의 보고'라고 했던 책을 긴 호흡으로 읽는 당연한 습관과 인내력은 퇴화됐다. 우리가 키보드에 익숙해진 사이 필기에 힘줬던 손의 '근(筋) 손실'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조금은 위로할 수 있을까. 요즘은 '북튜버'를 통해 책을 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영상 플랫폼에서 다양한 책을 소개하고 함께 지식을 공유하는 콘텐츠가 인기다. 서점가에 쏟아지는 수많은 책들 속에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주니 모래 속에서 진주를 쉽게 찾는 격이다.
한 권의 책에서 다양한 지식을 얻는 백과사전 같은 잡학서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을 냉철하게 톺아보고 우리의 관념을 통렬하게 파훼하는 논쟁적 주제들을 끄집어 내어 우리 사회의 한계와 문제점을 분석하는 책이 눈길을 끈다.
'우세한 책들'을 쓴 장윤미 문화평론가는 여전히 '책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음의 7가지 주제로 사회학, 인문학, 에세이, 소설 등 다양한 분야와 장르 27권의 책을 다룬다.
차별: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사람들
돌봄: 누가 누굴 돌봐야 하나
집: 사는 집이 계급이다
두려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
신념: 진심과 의심 사이, 소신과 맹신 사이
음식: 무엇을 어떻게 먹을까
희망: 각자도생은 이제 그만
'나는 숨지 않는다'(박희정 외), '있지만 없는 아이들'(은유),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김영옥 외), '타인의 집'(손원평), '죽음을 배우는 시간'(김현아), '가난의 문법'(소준철), '한국의 능력주의'(박권일) 등 27권의 책을 통해 여성, 장애, 돌봄, 계급 가난, 생존, 종교 등 우리 사회의 논쟁적 주제를 들추며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를 통해 단순히 사회적 통념을 파헤치는 데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와 구조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때론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 연민과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에 경종을 울린다.
저자는 "자립적 인간이란 혼자서 사는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또 받을 수 있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돌봄은 분명 우리 일상에서 멀어진 적 없는, 그렇기에 독박처럼 씌워져서도 기울어져서도 안 되는 상호적·지속적·순환적 행위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행위"라며 우리가 시혜처럼 여겼던 돌봄의 의미와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토로하는 이들에게는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러다 번아웃 오겠다고 옆에서 걱정이라도 해주면, 그건 성공한 사람들이나 앓는 거라며, 나는 그 정도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며 손사래 치고 겸손을 떤다. 생각해보면 남들 보기에 다 이룬 듯한 사람들도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다. 그 정도면 이제 편히 쉴 만도 한데 말이다. 그러니 아직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나에게 번아웃은 뭐다? 사치"라며 풀 죽지 말라 독전(督戰)하기도 한다.
저자는 "사람들 대부분은 보통의 운을 가지고 살며, 노력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종종 실패한다. 그러나 지금의 가난은 개인의 게으름보다 불합리한 자본주의 구조로 인해 만들어진 경우가 훨씬 많다. 구조가 기울어졌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어쩔 수 있느냐는 말로 외면하면 결국 구조는 더 위험하게 기울어진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열심히 살면 된다, 노력하면 된다, 남들보다 조금 자고 더 일하면 된다는 조언이 꼰대의 잔소리로 취급받는 이유는 이 명제가 꼰대들이 담배 피웠던 시절에는 통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며 "문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지 선수가 아니다. 골문을 향해 아무리 공을 차도 자꾸만 자기 앞으로 다시 굴러오면 유능한 선수도 좌절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는다.
책은 사회가 만들어낸 각종 문제에 직면한 세상의 한계를 다루는데 그치지 않는다. 비루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고, 타인을 향한 슬픔과 연민을 거두지 않고, 부끄러움과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 숨지 않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위한 '책 읽기'는 더 이상 숨지 않고 세상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 연대를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적극적인 힘이 되지 않을까.
■우세한 책들
장윤미 지음 | 사람in | 3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