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출범 720일 만에 처음 성사된 영수회담이 사실상 빈손으로 마무리됐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모두 발언을 통해 그간 강조했던 '민생회복 지원', '국정기조 전환' 등의 의제를 다 쏟아냈다.
특히 윤 대통령의 면전에서 '가족 의혹 정리', '채상병 특검 수용', '1인당 25만원 민생지원금' 등의 의제에 대해 깨알 같은 설명을 해가며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야말로 던질 수 있는 의제는 다 던진 셈이다.
이 대표로선 '할 말은 하는' 이미지를 보여줬다는 성과를 거뒀다. 회담 비공개 부분에서 이 대표의 질의에 윤 대통령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가며 거의 대부분의 의제를 반대한 것도 오히려 입법 강행의 명분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대화를 시도했으나 거절했다는 주장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비롯되는 야권의 주도권과 입법 공세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영수회담 이후 정국이 오히려 더 꼬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민생회복지원금부터 각종 특검까지 테이블에…野 "변화 없어" vs 대통령실 "대승적 인식 같은 부분 있어"
영수회담은 29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10분가량 윤석열 대통령과 민주당 이재명 대표, 실무진이 배석한 채 차담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3차례 실무회동에서 의제 조율에 실패해 '열린 회담'으로 이뤄졌고 별도 합의문 작성도 없이 끝났다.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 간의 독대도 없었다.
회담에서 윤 대통령은 민생 회복 긴급조치와 R&D(연구개발) 예산 증액, 이태원특별법 등에 관해 민주당과 반대 입장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는 본격 회담 전 미리 준비해온 4500여 자 분량 원고를 읽으며 △민생 회복 지원금 지급 △R&D 예산 복원 △전세사기특별법 및 이태원특별법 처리 △해병대 채상병 특검 △가족 등 주변인 의혹 정리 △의료개혁 국회 공론화특위 설치 △연금개혁 추진 등 그동안 주장해온 모든 의제를 쏟아냈다. 하지만 의료개혁을 제외하고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민주당 박성준 수석대변인은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통령의)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고 혹평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표께 영수회담 소회를 물었더니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씀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온도차를 보였다. 이날 회동에 대해 "합의에 이르진 않았지만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 한 부분이 있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도운 홍보수석은 민주당 측이 의료 개혁 필요성에 공감했으며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민생을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바라봤다고 말했다. 또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관계자는 특정 의제만 언급할 경우, 의제에 경중을 두고 있다는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다 열어놓고 대화하자'는 대통령실의 제안에 따라 언급할 수 있는 의제를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고 말했다. 다만 민생 등 경제 현안 이외의 민감한 의제는 애초에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았던 만큼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野, 5월 임시국회 '이태원특별법' '채상병 특검' 강행 기류…22대 국회도 대치 지속 전망
이번 회담이 큰 성과 없이 끝나면서 5월 임시국회에서 여야 대치는 극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이태원참사특별법, 해병대 채상병 특검법 등을 21대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다만 윤 대통령은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대해 '독소조항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나타내고 있다. 박성준 수석대변인은 "사실상 회담에서 윤 대통령이 이태원특별법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때문에 이번 추진에도 민주당이 독자적인 행보에 나설 전망이다.
이 같은 거대 야당의 움직임과 이로 인한 정부·여당과의 갈등은 22대 국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단독 과반을 얻은 민주당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재추진할 경우 잡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이날 회담 모두발언에서 윤 대통령에게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의혹'을 정리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실상 김건희 여사 비리 의혹에 대한 특검법 수용을 요구한 것이다. 김 여사 의혹을 비롯해 채상병 특검법이나 전세사기특별법 등에 관해서는 시간 관계상 추가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의료개혁을 제외한 어떤 의제에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만큼 논의가 됐더라도 전향적인 반응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