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정원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으로 2월 말 촉발된 의료공백이 70일이 되도록 좀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학별 의대 증원분(分)을 '최대 절반'까지 감축하는 방안을 허용하겠다며 한 발 물러서는 듯했던 정부는 이 정도 선이 '최대한의 양보'임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의료계는 '증원 전면 백지화'가 아닌 조정안은 절대 수용 불가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같은 갈등은 2025학년도 대학입학전형이 결정되는 5월을 맞아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두 달 여간 활동을 이어온 대한의사협회(의협) 비상대책위원회의 임기 종료와 맞물려 현 정부의 '의료개혁'을 '의료 농단'으로 폄하한 임현택 차기 회장이 이끄는 새 집행부가 출범하기 때문이다.
임 당선인은 '의대증원 전면 백지화 없이는 대화도 없다'는 원칙을 거듭 천명해 의료계의 대정부 강경 기조는 가속 페달을 밟을 전망이다. 의협의 의사 결정기구인 대의원회의 신임 의장도 차기 집행부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서, '단일대오'에 힘을 실었다.
'증원 저지' 비대위, 말일 해산…'임현택 집행부'에 힘 실어
29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의협은 전날 서울 서초구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제76차 정기 대의원 총회에서 '의대 증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의 임기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의협 비대위는 예정대로 오는 30일 해산된다.
다음달 1일부터는 제42대 의협 회장을 맡게 된 임 당선인 체제가 본격화되는 셈이다.
당초 비대위가 협회의 최대 현안인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 과제를 전담하는 기구로 꾸려진 점을 감안해 새 집행부와 '투 트랙'으로 운영하는 등 활동 연장 가능성도 거론됐지만, 대응체제 이원화의 실효성이 낮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임 당선인이 지난달 말 당선 직후부터 비대위원장을 공동 수행하기를 원했을 만큼 주도권에 대한 의지가 강한 점, 장기화된 활동에 지친 비대위 간부들이 업무 이관을 희망한 점 등도 작용했다는 전언이다.
앞서 의협 비대위는 지난 2월 6일 정부가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을 2천 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이필수 당시 의협 회장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대정부 투쟁의 전권을 위임받아 출범했다.
김택우 비대위원장은 선출 이후 "정부의 불합리한 의대정원 증원 추진을 반드시 막아낼 것"이라며 굳은 각오를 밝혔지만, 비대위 발족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차기 집행부에 공을 넘기게 됐다.
그는 전날 대의원 총회에서 "이제는 비대위를 해산하고 (새로운) 집행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며 "전공의와 교수들이 의협을 중심으로 힘을 합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의협 비대위는 이달 초 사실상 김 위원장의 자진 사퇴를 요구한 임 당선인 측과 충돌하며 잠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지난 14일 비대위 회의에서 김 위원장과 임 당선인이 전격 '화해 모드'로 돌아섰다. 저간의 소동은 '소통 부족'에서 빚어진 해프닝으로 치부하며 "'14만 의사는 모두 이제 하나다'라는 합의를 이뤘다"(임 당선인)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간 비대위는 의협 내에서 상대적인 '온건파'로 분류돼 왔다. 현재 의사 수가 부족하지 않다는 인식 아래 의대 증원이 비합리적이란 문제의식은 강경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증원 1년 유예 후 재논의' 등 합당한 근거와 협의 절차가 갖춰진다면 증원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임 당선인 측이 가장 불만을 품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대위가 임 당선인을 구심점으로 똘똘 뭉치겠다는 뜻을 밝힌 만큼 향후 의·정 갈등도 더 경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계 안팎에서 '초강경파'로 평가되는 임 당선인은 회장직에 당선되자마자 의대증원 전면 철회는 물론, 조규홍 복지부 장관·박민수 제2차관의 파면과 함께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한 인물이다.
임현택 "증원 백지화 없이 한발짝도 안 움직여"…의정갈등 최고조 이를 듯
임 당선인은 전날 대의원 총회 인사말을 통해 "한국의료는 이미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깊은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며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한 자세를 취하기는커녕 '의료 개혁'이라며 의대정원 증원 2천 명을 고수해 대한민국을 '의료 망국의 길'로 내달리게 하고 있다"고 정부를 맹공했다.
그러면서 "의대생은 '이성을 잃은 정부 정책'에 분노해 학교를 떠났고, 몸을 갈아 넣어 환자를 보살펴 온 전공의는 '적폐 세력'으로 몰리고 있다며, 현 정부가 "마녀사냥 하듯이 의사 죽이기에 혈안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현 사태는 의료계와 정부가 동등하게 맞서고 있는 '의정 갈등'이 아니라, "정부의 일방적인 권력 남용"이라고 매도했다. 임 당선인은 정부가 보건의료 분야의 전문가인 의사들을 정책적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의료 정책의 흥정 대상으로 여기거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고 오산"이라고 언급했다.
의료계를 존중하는 '척도'는 의대 증원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임도 재확인했다. 임 당선인은 "정부가 우선적으로 2천 명 의대증원 발표를 백지화한 다음에야 우리 의료계는 다시 원점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의료계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어떠한 협상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것만이 우리 의료계가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의료를 새롭게 시작하는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총회 당일 의협 대의원회 새 의장으로 뽑힌 김교웅 한방대책특별위원장도 "(새 의협) 집행부가 잘하도록 대의원회에서 적극 후원할 것"이라며 임 당선인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처럼 의협이 새 집행부 방침에 따라 정부의 완전한 정책 철회를 협상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우면서, 의·정 간 긴장도 최고조에 이를 전망이다. 의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의사단체의 '보이콧' 속에 불완전한 출발을 알린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도 의료계의 참여를 더욱 담보하기 어렵게 됐다.
의료개혁특위는 '큰 틀'에서 의료계의 고질적 문제들을 논의하는 특위의 성격상 구체적인 의대 증원 이슈를 안건에 올릴 계획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의협 차기 집행부는 의대 교수들의 개별 사직 및 '주 1회 휴진' 결의 등을 두고도 정부와 날을 세우고 있다.
임 당선인의 회장직 인수를 돕는 인수위원회는 교수들의 정기 휴진 확산 움직임을 두고 '관계법령 위반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밝힌 정부를 향해 "정부가 교수님들께 동네 양아치 건달이나 할 저질 협박을 다시 입에 담을 경우, 발언자와 정부에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임 당선인은 27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을 통해 "복지부가 교수님들을 범죄자 취급하고 겁박한 데 대해 매우 분노한다"며 "만약 교수님들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14만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총력을 다해 싸울 것임을 명백히 밝힌다"고도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