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첫번째 유색인종 총장이라는 타이틀도 소용 없었습니다. 논문 표절 의혹이 일자 클로딘 게이 전 총장은 결국 사임해야 했습니다. 게이 전 총장이 표절했다는 논문의 원저자를 포함한 일부 동료들의 두둔과 해명이 나왔지만 논문 표절이라는 원죄의 죗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버드 이사회 조사 결과, 게이 전 총장이 논문의 핵심 내용이나 설문 자체를 표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통계 조사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동료의 논문에서 본떠온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하버드대의 공식적인 윤리 기준(Harvard Guide to Using Sources)에 맞지 않는 행태였고 결국 총장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버드대의 윤리 기준이 유별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다른 교육기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교육부도 "존재하지 않는 연구 원자료 또는 연구자료, 연구결과 등을 허위로 만들거나 기록 또는 보고하는 행위(연구 위조)", "일반적 지식이 아닌 타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또는 창작물을 적절한 출처표시 없이 활용함으로써, 제3자에게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행위(표절)"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우리 공당(公黨)들입니다. 타인의 데이터를 무단으로 도용하고 그렇게 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보에 대해 "문제 없다"며 공천을 유지한 국민의힘 말입니다.
논문 표절, "기억 안 난다"는 후보와 "문제 안 된다"는 공관위
국민의힘 소속으로 경기 남양주갑 공천권을 따낸 유낙준 후보. 유 후보는 2008년 '군 조직 내 멘토링이 부하의 조직몰입과 소외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제하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경주 위덕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은 2004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발표된 이윤화의 석사 논문 '멘토링 기능이 멘토링 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에 쓰인 데이터를 무단으로 인용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참고 기사: [단독]'연구 위조' 의혹 유낙준…與 공관위 부실 검증 논란)이 사실이 드러난 뒤 국민의힘 공관위 반응은 어땠을까요. 장동혁 사무총장은 "해당 대학에서 걸러져야 될 문제이고, 저희들이 공천하는 과정에서는 그 문제가 명시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없다"며 "공관위에서 논문 표절 여부를 확인하거나 공천에 반영할 단계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위덕대에서 논문 심사를 충실히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힘 공관위가 자당의 이름을 걸고 출마할 후보에 대해 부실하게 검증했다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피심사자는 국민의힘 공관위에 '부정한 방법으로 학위를 받은 적이 있다'는 자기 검증 항목이 포함된 공천 서류와 함께 심사료 200만원을 냅니다. 피심사자 본인의 양심에 상당 부분 기대는 거죠. 여야 가리지 않고 "공당은 수사기관이 아니므로 서류 제출을 강제할 수 없다"고 해명해 왔습니다. 현실적 고충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심사료까지 받는 공관위가 논문 표절 여부를 자기 검증에 맡긴다는 것은 공당의 역할을 다소 망각하는 것 아닐까요? 흔히 국회의원 개개인을 놓고 국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학문 윤리조차 어긴 사람에게 그 자격을 줘도 되는 걸까요? "(논문을 쓴 지)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뭐가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고 그런(베낀) 사실은 없다. 지금 기억할 수는 없다"고 한 후보에게요.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면 자신의 공약도, 발의한 법안에 대해서도 기억 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을까요?
더욱이 국민의힘은 자당 역사상 처음으로 '시스템 공천'을 도입한다고 공언했습니다. '이기는 공천'을 하겠다고도 했죠. 그런데 정영환 공관위원장은 지난 17일 "유 후보에 대한 재검토를 논의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현재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정 공관위원장은 교수 출신입니다.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표절 시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해야 마땅합니다. 특정 인물이나 계파의 입김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여론조사 등 정량 점수만으로 공천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 시스템 공천의 핵심입니다. 검증 수준이 여타 학문기관의 윤리 기준보다 높지 못하고 기본적인 참, 거짓도 가려내지 못한다면 '시스템 공천'은 허울 뿐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스스로 부실 검증이었던 것을 자인한 셈이니까요.
'문도리코' 문대성부터 대만 미래권력까지 발목잡은 논문 표절
우리 정치권이 원래부터 논문 표절에 관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도리코(문대성과 복사기 신도리코의 합성어)'로 악명 높았던 문대성 전 새누리당 의원은 국민대 박사 학위 논문이 표절이라는 예비조사 결과에 결국 당을 탈당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인사 검증 7대 원칙에 논문 표절을 포함시켰을 정도로 우리 정치권에서 논문 표절은 중대한 문제로 여겨졌었습니다. (다만 문재인정부에서도 논문 표절 의혹을 딛고 청문회를 '무사 통과'했던 사례가 있습니다.)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장식하는 게 유명인의 논문 표절 의혹이어서였을까요, 어쩐지 우리 정치권은 글로벌 트랜드와 달리 논문 표절 이슈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논문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퇴하는 게 추세인 것 같거든요. 올해 초 논문 표절 의혹이 노르웨이 정계를 강타했습니다. 산드라 보쉬 교육부장관은 논문 표절로 사임했고, 잉빌드 케르콜 보건부장관은 여전히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한 해외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대만에서는 차이잉원 전 총통의 후계자 격이었던 린즈젠 전 신주시장이 석사 학위 논문 표절 의혹에 휘말리면서 후보직에서 전격 사퇴했습니다. 논문 표절이 흔한 범죄가 됐더라도 타인의 노력을 훔치는 행위 그 자체의 죄과가 가벼워질 수는 없으니까요.
의문은 남습니다. 국민의힘은 이번 공천 과정에서 김현아(경기 고양정), 정우택(청주 상당), 도태우(대구 중·남), 장예찬(부산 수영)까지 무려 네 후보에 대한 공천을 번복했습니다. 처음부터 공천 취소 기류가 우세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다 수도권·중도층 위기론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공천권을 거둬들였습니다. '무결점 공천'은 이미 불가능해진 상황이고 유 후보가 처음 나온 문제적 후보도 아니었습니다.
의심은 갑니다. 저 네 지역구의 공통점이 보이십니까? 국민의힘이 탈환을 노리거나 뺏길 수 없는 지역구들입니다. 반면 남양주갑은 17대부터 21대 총선까지 20년 가까이 국민의힘이 깃발을 꽂지 못한 지역입니다. 도저히 탈환 가능성이 없는 '험지'인 만큼 굳이 자당 공천에 있어 결점 하나를 더 인정할 필요는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요? 해당 지역구 후보의 결점은 온전히 지역구민과 지역구 당원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