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라운드 인터뷰를 열어 오랜만에 취재진을 만난 김범수는 앨범 프로젝트, 공연을 진행하는 등 "아주 게으르게 지냈던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직전 정규앨범을 발매한 지 10년이 되었다고 말했다. "진작 앨범을 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기다려 준 이들에게 "너무 죄송하다"라는 김범수는, '힘 뺀' 11곡을 담아 아홉 번째 정규앨범 '여행'을 냈다.
많은 곡을 수록한 정규앨범을 발표하고 길게 활동했던 시대는 어느새 과거가 되었다. 인제 '실물 음반 제작'은 필수가 아니며, 디지털 형태로 나오는 '음원'이 보통이 됐다. 음원 차트의 인기곡은 점차 공고해지고, 새로운 곡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건 이전보다 더 까다로워진 모양새다. 음악 시장의 전반적인 흐름 변화를, 김범수 역시 절감하고 있었다.
정규 8집 '힘'(HIM)은 힙합, 알앤비 등 김범수가 평소 좋아하고 또 하고 싶었던 음악으로 채운 결과물이었다. 차츰 앨범 참여율을 높여 왔던 김범수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앨범이기도 하다. '보컬리스트'로 남을 것인가, '싱어송라이터'로 갈 것인가. 전설의 보컬리스트인 휘트니 휴스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곡 만들기를 "노래만큼 잘할 자신"이 없었기에, 곡 욕심을 버리고 "좋은 노래를 내 것으로 만들고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김범수는 성량, 음역, 감정 표현 등 모든 부분에서 '톱'이라고 할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보컬리스트로 꼽힌다. 작사·작곡을 가창만큼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김범수의 기준이 너무 높아서는 아닐까. "사실은 맞다"라며 웃은 김범수는 "자기 음악적인 색깔과 철학을 담아 자기 얘기를 하는 그런 싱어송라이터들이 각광받고 있다"라고 운을 뗐다. "곡을 수려하게" 쓰는 방향으로는 "최고가 될 자신이 없"었기에, '좋은 곡'을 받는 데 주력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최유리 음악을 듣고 위로를 많이 받았다. 김범수는 지금 최유리의 음악이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물잔에 가득 찬 물을 보고도 자그마한 구멍을 이유로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진 시대에, 오히려 아무 것도 없는 물잔에 물이 조금 채워진 데 '감사'를 표현하는 것 같아 최유리의 음악이 인상적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돌아보니 자기 상황도 그랬다. 신인 때보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는데도, 코로나 시기에 '어쩔 수 없이' 본업을 하지 못했을 때 "위축돼 있던 게(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최유리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김범수라는 가수에 관한 생각을 투영한 곡을 원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수많은 부딪힘과 실패를 지나온 자의 여행. 곡을 들었을 때 "굉장히 뭉클"했다는 김범수는 처음부터 타이틀곡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고 전했다.
앨범 작업은 이전보다 수월했을까. 김범수는 "예전에는 피지컬, 가창력 등 기술적인 것들을 많이 활용했던 것 같다. 보컬이다 보니 컨디션에 지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녹음 잡아놓고도 목소리가 좋지 않으면 취소하고, 그런 것들로 앨범이 늦어졌다면 이런 부분에서는 한편으로 수월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테크닉적인 부분이나, 고음역대 보컬을 많이 내려놓고 한 앨범이기 때문에 컨디션 영향을 좀 덜 받은 건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쉬웠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가사를, 감정을 잘 전달하고 싶어 애썼기에 "좀 더 내면적인 작업"에 에너지를 쏟았다. 결과적으로 앨범 제작에 쓴 에너지는 비슷했다고. 곡에 맞는 감정선이 잡히지 않으면 녹음을 못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며 녹음을 취소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정말 이 얘기를 할 수 있는 때"만 음악으로 담아냈다.
반대로 가장 만만치 않았던 곡은 피아니스트 김지향이 작사하고 송영주가 작·편곡과 피아노 연주를 맡은 '머그잔'이다. '머그잔'을 "피아노 한 대로 하는 너무 미니멀하고 나이스한 곡"이라고 생각했다는 김범수는 내심 작업이 쭉쭉 진행되리라고 바라봤다. 원 테이크(한 번에 바로 녹음)로 가면 될 것 같다는 예상은 빗나갔다. 두 달 정도 걸렸다. '감정'이 안 나와서다.
김범수는 "한 번 감정이 막히기 시작하니까 아무리 불러도 맛이 안 나서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고, 결국 쉬었다가 다른 거 작업하고 뒤쪽에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전했다. 잘 안되는 노래가 있으면 쉬는 편이라는 김범수는 집에서 '머그잔'을 조금씩 불러보며 감을 잡았다. 그는 "너무 편안하고 재지(jazzy)한 곡이니까 프리하게 부르면 될 것 같았는데, 정말 전략적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였더라"라고 돌아봤다.
"어느 순간 제가 내린 정답은, 우리가 어떻게 보면 너무 큰 사랑을 받은 시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시대를 잘 타고나서 너무 원 없이 사랑도 받았고 (그래서) 지금 마치 주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린 우리의 영역이 그대로 남아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난 내 일을 하면 되지 않나 해요. 이번 앨범을 낸 게 잘되면 너무 좋겠죠. 제가 계속해서 이 작업을 하고 있단 건 제 자신에게 증명하고 있고, 대중분들에게도 많이 알려드리고 싶어요. 저라는 가수가 25년 동안 노래해 왔지만 계속해서 다른 얘기를 해나가고 있다는 걸 많은 분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 어떤 결과보다 저에게 더 중요한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