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가스라이팅…피해자 일기장속 단서 발견한 검사들

2006년 지인 따라 간 법당서 만나
"나는 살아있는 부처" "돈 갖고 있으면 다쳐"
심리 지배해 15년 동안 14억원 뺏은 무속인
가족 설득 끝에 피해자 경찰에 고소
불구속 송치…일기장 16권 139회 범죄사실 찾아
작년 12월 60대 여성 특경법 사기 혐의 구속기소
청주지검 영동지청 '대검 형사부 우수사례' 선정


충남 공주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A(61)씨는 2006년쯤 지인 소개로 처음 가까운 법당을 찾았다. 가벼운 상담으로 시작한 대화는 소소한 개인사를 넘어 금세 가정의 대소사로 번졌다. 의지하는 마음이 커져 갈수록 친구 같기도 언니 같기도 했던 승려 B(68)씨는 자꾸만 돈을 달라고 했다. '돈을 갖고 있으면 가족이 다칠 수 있으니 대신 맡아 주겠다', '자식을 공무원으로 취업시켜 주겠다' 등 빌미도 덩달아 많아졌지만, A씨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점점 B씨를 더 의지했다고 한다.

2012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숨진 후 A씨는 이전보다 법당 문턱을 더 자주 밟았다. 급기야 자기를 생불(生佛·살아있는 부처)이라던 B씨는 A씨에게 "가족과 같이 살면 애들이 죽을 수 있다"며 자녀 세 명을 집에서 내보내라고 했다. 외톨이가 된 A씨는 정신적으로 빠르게 쇠약해졌다. 가지고 있던 부동산까지 처분해 법당에 돈을 갖다 바쳤다. 그렇게 그가 2021년까지 15년 동안 뜯긴 돈이 14억원에 이른다.

A씨는 어렵게 다시 만난 가족의 설득 끝에 지난해 2월 B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경찰 조사에서 B씨는 "모두 A씨를 위한 것이었다"며 범행을 부인했고 경찰은 불구속 상태로 B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이 사건을 넘겨받은 청주지검 영동지청 강성기 지청장(사법연수원 37기)과 원현호 검사(변시 8회)는 사건을 검토한 끝에 단순 사기로 볼 수 없다고 의심하고 원점에서 재수사에 착수했다. A씨가 범행 기간 빠짐없이 써온 일기장이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검찰은 A씨 일기장 16권과 17개 계좌 내역을 꼼꼼하게 전수조사하면서 B씨가 가스라이팅하는 과정, 두 사람이 심리적 지배 관계가 된 경위, 돈을 뜯어내는 수법 등을 하나씩 규명해 총 139차례의 구체적 범죄 사실을 특정했다.

연합뉴스

검찰은 결국 B씨를 지난해 말 특경법상 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대검찰청은 이 사건을 수사한 강 지청장과 원 검사를 '2023년 12월 형사부 우수 수사사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A씨는 정신적으로 예속돼 모든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앉았으며 가족들과 단절된 채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검사는 피해자가 마음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도록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심리상담을 의뢰하는 등 피해자 보호 및 지원에도 정성을 다했다"고 밝혔다.

대검은 이 밖에도 '수원 일가족 전세사기 사건'을 맡은 수원지검 형사5부(이정화 부장검사)도 우수 사례로 꼽았다. 수사팀은 2021년 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가족과 임대 업체 법인 명의를 이용해 경기 수원 일대 800세대가량의 주택을 취득한 뒤 임차인 214명으로부터 전세 보증금 225억원을 편취한 혐의로 부동산 임대업체 대표 정모(60)씨 일가를 재판에 넘겼다.

자해 뒤 동거인을 살인미수죄로 무고한 사실을 밝혀낸 창원지검 형사2부(최미화 부장검사·임성열 검사), 단순 성폭력 범죄로 송치된 사건을 전면 재수사해 보복 폭행과 무고 등 추가 범죄를 밝혀낸 인천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일희 부장검사·김정은 검사), 허위 세금 계산서 교부 사건을 규명해 기소한 수원지검 평택지청 형사3부(이지연 부장검사·안창보 검사)도 우수사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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