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신호 위반으로 교통사고를 낸 고등학생에게 요양급여를 지급했다가 '중대한 과실로 사고가 났다'며 환수 조치에 나섰지만,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법원은 당시 비가 많이 내렸고, 과속도 없었던 점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운전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속임수나 부당한 방법으로 병원비를 지급받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이주영 부장판사)는 고등학생 A씨의 부모가 '부당이득금을 환수하겠다고 고지한 처분을 취소하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A씨 부모의 손을 들어줬다.
앞서 2022년 6월 늦은 밤, 고등학생인 A씨는 경기도 안양시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신호 위반으로 좌회전 차량과 충돌했다. 이 사고로 A씨는 5개월의 치료를 받았고, 공단은 병원에 요양급여비용으로 약 2677만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후 공단은 '신호 또는 지시위반의 중대한 과실로 이 사건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이는 구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른 보험급여 제한 대상에 해당하므로, 결국 원고가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를 받은 것'이라며 A씨에게 지급된 요양급여비용에 대해서 환수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A씨의 가족이 반발하며 이번 소송이 진행됐고, 법원은 여러 증거를 토대로 A씨 측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비가 거세게 내렸고, A씨가 낮에는 공부를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한 점, 과속도 없었던 점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A씨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사고를 일으켰다고 단정할 수 없고, 그렇기에 속임수나 부당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를 받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재판부는 "A씨의 신호위반 행위는 도로교통법에 따라 처벌되는 범죄행위에 해당하고, 원고가 정지신호를 준수했다면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라며 "그러나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원고가 이 사건 사고 당시 순간적인 집중력 저하나 판단 착오로 신호를 위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따라서 이 사건 교통사고가 원고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해 발생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이어 "원고가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를 지급받았다고 볼 수 없다"라며 "따라서 이와 다른 전제에서 이뤄진 이 사건 처분은 위법해 취소돼야 한다"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중대한 과실이라 함은 거의 고의에 가까운 현저히 주의를 결여한 상태를 말한다"라며 "A씨가 음주나 과속을 했다고 인정할 만한 사정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신호를 위반했다는 사정만으로 원고가 고의에 가깝도록 현저히 주의를 결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