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미 민주·공화 각당의 대선 후보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만약 전·현직 대통령 간 '리턴 매치'가 벌어진다면 내년 대선을 좌우할 최대 변수는 미 연방대법원이 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미국을 움직이고 지탱하는 힘은 헌법이고, 헌법조항 하나하나가 추상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일상을 좌우하는 실질적 힘을 갖고 있다.
이런 헌법을 해석·적용해 개인의 삶을 보호하는 기관이 연방대법원이라는 점에서 미 대선에서 연방대법원의 역할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물론 지난 2000년에도 연방대법원이 대선 결과에 결정타를 날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쳇말로 '판이 더 커졌고', 연방대법원의 결정 하나하나가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2000년 미 대선, 잊지못할 '플로리다 재검표 사건'
잠깐 샛길로 빠져서, 연방대법원이 대선에 큰 영향을 준 2000년으로 돌아가보면, 당시 연방대법원은 아들 조지 부시와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이 맞붙었던 대선에서 '플로리다 재검표' 문제와 관련해 부시의 손을 들어줬다.이후 연방대법원은 선거 개입 논란과 함께 국론 분열이라는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했다.
당시 플로리다주에서는 투표 용지가 복잡하게 제작된데다 투표용지에 구멍을 내는 방식으로 후보를 선택하게 해, 결국 무효표로 처리된 경우가 많았다.
기계식 개표 결과 부시 후보가 900표 차이로 승리했는데, 고어 후보 지지자들의 청원과 주 법원의 승인에 따라 수작업 재개표가 이뤄졌다.
수개표가 일부만 진행됐는데도 표차가 300표로 줄어들었고, 승자독식제의 미국 대선 방식을 감안할 때 차기 대통령의 이름이 바뀔수도 있는 상황이 연출됐다.
이에 이번에는 부시 후보측에서 주법원의 관할권 문제와 위헌 문제 등을 제기하며 '수작업 재개표를 막아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사건에서 대법관들은 재개표 중단을 명령해 부시의 승리가 확정됐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법관이 93세를 일기로 얼마전 타계한 샌드라 오코너 판사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오코너 대법관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지만, 타계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내가 고인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플로리다 재검표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된다.
2024년 대선에서도 '운명'을 쥔 연방대법원
이번에도 2000년 못지 않은 상황이 연방대법원 앞에 속속 펼쳐지고 있다.
먼저 지난 19일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주(州)의 공화당 대선 경선 투표용지에서 뺄 것을 주 정부에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미국 여러 지역에서 제기된 비슷한 내용의 소송 중 처음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자격을 부정한 판결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측은 당연히 상고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렇게 되면 최종 판결은 연방대법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1·6 의사당 난입 사태'와 관련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장하고 있는 '면책 특권' 판단 역시 연방대법원이 칼자루를 쥘 공산이 커지고 있다.
앞서 1심 법원에서는 트럼프측의 '면책 특권' 주장을 기각했는데, 트럼프측은 항소 절차 등을 밟으며 본 재판을 어떻게든 지연시키려는 작전을 펴고 있다.
이에 잭 스미스 특검은 "트럼프 전 대통령측이 주장하는 '면책 특권'에 대해 아예 연방대법원이 신속하게 검토해 결론을 내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특검은 "1974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행정 특권 주장으로 인해 워터게이트 재판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 연방대법원이 유사한 일을 했다"며 연방대법원을 대놓고 압박하기도 했다.
실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특검은 연방대법원에 대통령의 '행정 특권'을 신속하게 검토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법원은 만장일치로 특검의 편을 들어줬고 닉슨은 바로 사임했다.
여기다 먹는 낙태약 '미페프리스톤' 문제도 걸려있다.
지난해 6월 '로 대 웨이드' 판례 파기로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는 진보·여성계로부터의 역풍을 맞았던 연방대법원은 최근 '미페프리스톤'의 판매 문제와 관련한 검토에 들어갔다.
연방항소법원이 미페프리스톤의 사용을 기존 '임신 10주 이내'에서 '7주 이내'로 제한하고 원격 처방 및 우편 배송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린 것에 미 법무부가 상고하면서, 연방대법원에게로 공이 넘어간 것이다.
결론은 대선 한복판인 내년 6월말쯤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에 따라서는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에 맞먹는 후폭풍이 예상된다.
미국에서 이뤄지는 낙태의 절반 정도가 미페프르스톤에 의존할 정도여서, 연방대법원의 결론이 여성들에게 미칠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 이후 치러진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와 지난 11월 버지니아 주의회 선거, 오하이오 주민투표, 켄터키 주지사 등의 선거 결과는 사실상 '낙태권이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민주당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코앞으로 다가온 대선도 피해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보수 우위의 현 연방대법원, '숙제' 어떻게 풀어낼까
트럼프 행정부 시절 지명한 3명의 대법관으로 인해, 현재 연방대법원은 6 대 3으로 보수 우위의 구조이다.
최근 잇따르는 보수 성향의 판결과 클래랜스 토마스 대법관의 비위 등으로 인해 연방대법원의 신뢰도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다.
물론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이 자동적으로 공화당 후보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이민 규제 완화와 흑인에게 불리한 선거구 획정 위헌 등 이들이 최근 내놓은 진보적·탈(脫) 이념적 판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제 공은 연방대법원으로 넘어왔다. 이들의 결정은 동시대의 역사가가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고, 후대가 꼼꼼하게 평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