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위대한 외교관 '키신저'…호불호 속 큰 '족적'

지난 1976년 8월 11일(현지시간)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 연합뉴스

올해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는 등 최근까지도 활발한 대외 활동을 이어왔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학자, 정치가, 외교관, 작가, 컨설턴트, 사업가 등 그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정치현실주의자'로 기억한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에게 아직까지도 비난과 호평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다. 
 
닉슨과 포드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번갈아 맡으면서,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막강한 힘을 행사했다. 
 
보통은 각각 다른 사람이 맡는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동시에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0년대 미국과 소련과의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펼쳤고, 1972년 5월 미·소 양국 간 핵무기 배치를 동결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도출해 냈다. 
 
핵 전쟁의 공포에 떨었던 미국인들에게 '영웅'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핑퐁 외교'를 기화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이끌어냈고, 결국 1979년 양국 수교의 밑거름이 됐다. 
 
1973년 1월 북베트남 대표 레득토(黎德壽)와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그는 남·북 베트남, 미국 사이에 종전을 선언하는 파리평화협정을 성사시켜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다만 1975년 레득토가 남베트남을 침공하자, 상을 반납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때도 키신저 전 장관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관계 개선을 위해 두 국가를 십여 차례 오가는 '셔틀 외교'를 통해 휴전을 이끌어냈다. 
 
당시 분쟁은 키신저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직을 유지하면서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지 2주만에 발생했다.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중동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지만, 국무장관이라는 새 직책은 그를 그냥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았다. 
 
그늘도 없지 않았다.
 
'친중 인사'인 키신저 전 장관은 1989년 6월 톈안문(天安門) 학살에 대해 '딜레마'라고 표현해 반대파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지지한 것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동티모르 독립을 막으려는 인도네시아의 잔인한 진압을 애써 모른척 했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이처럼 그가 실용적이라고 여긴 것을 추후 비평가들은 "인권이나 심지어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도 없이 무원칙한 책략이었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파리평화협정으로 북베트남이 통제권을 장악함에 따라 남베트남을 어두운 운명에 빠뜨린 장본인이며, 평화협정을 질질 끌면서 3년 동안 지옥같은 전쟁을 계속하도록 방치했다는 질책도 받는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냉전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무력을 사용하려는 의지 때문에 인도주의적, 인권적 고려에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다며 아예 그를 전범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소련과의 데탕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해 소련에 저항하다 추방된 솔제니친을 만나지 말라고 그가 포드 대통령을 설득한 일화도 반대파들이 늘상 '키신저의 본 모습'이라고 꺼내는 단골 메뉴다.
 
이에 대해 키신저 전 장관은 "역사는 가장 드문 상황에서만 명확한 대안을 제시한다"며 "현실 세계에서 정치가는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고, 오직 다양한 형태의 악 중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실정치 자체가 '도덕적 의무'라고 맞받아 친 것이다.
 
나치 체재하의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이민자인 키신저 전 장관은 1938년 10대 때 미국 뉴욕에 도착했을 때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왼쪽)가 미국의 키신저 대통령 특별보좌관에게 베이징 오리구이 요리를 젓가락으로 집어주고 있다. 연합뉴스

공립 고등학교에 진학해 영어를 빨리 익혔고, 돈을 벌기 위해 면도기 공장에서도 일을 했다.
 
뉴욕 시티 칼리지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육군에 징집됐다. 제대후 24살 때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그를 미국 외교의 최정점으로 끌어올려준 학문적 경력을 본격적으로 쌓게 된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키신저 전 장관이 냉전의 세계 질서를 바꾼 20세기 가장 위대한 외교관이었다는 평가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특히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계속해서 책을 썼고, 인품과 명성으로 인해 그는 중요 컨퍼런스에 패널로 초대됐으며 각종 파티의 VIP 손님이었다.
 
그는 90대에 들어서도 신문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직 대통령과 주요 현안을 놓고 상의했으며, 코미디 쇼에도 자주 출연했다.
 
2021년에는 인공지능(AI)과 관련한 책을, 2022년에는 리더십과 외교에 대한 저서를 펴냈다.
 
아들인 데이비드 키신저는 올 봄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아버지는 꺼지지 않는 호기심으로 세상과 역동적으로 소통하고 있다"며 "그의 정신은 당대의 실존적 과제를 파악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뜨거운 무기"라고 말했다.
 
중국의 정찰 풍선 사태로 미중 관계가 썩 좋지 않았을 때인 지난 7월 100세의 나이에 그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중국 고위 관리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독보적인 정치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도 미중 수교에 역할을 한 키신저 장관에게 "양국 발전과 우정을 위해 당신이 한 역사적인 공헌을 기억할 것"이라며 "우리는 오랜 친구를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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