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겁(曠劫·과거의 지극히 오랜 세월)과도 같은 길고 어두운 내면의 터널을 지나 오롯이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작은 틈을 찾는 심적 여정. 그 작은 '찰나'(刹那·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또는 지극히 짧은 시간)를 세심하게 포착해 간 '만분의 일초'는 여정의 끝에서 관객들에게 작은 안도감과 한 줌의 다정함을 손에 쥐어준다.
대한민국 검도 국가대표 최종 선발 라인업에 오른 재우(주종혁)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황태수(문진승)에게 드디어 검을 겨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날'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재우의 검은 목적을 잃은 채 허공을 가르고, 그 검은 끝내 황태수가 아닌 재우 자신에게로 향한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확률 0%. 그리고 그 확률을 깨뜨릴 0.0001%의 찰나를 향한 재우의 치열한 기록이 시작된다.
빤한 스포츠물의 길로 가지 않고 재우라는 인물의 시점을 중심으로 한 심리물로 전환한 감독은, 스포츠물의 전형성을 벗어나면서 여타 스포츠 장르가 그러하듯 성장이란 길 역시 거부한다. 그렇게 영화는 심리 드라마의 길을 간다. 재우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만분의 일초'가 검도를 소재로 택한 건 적절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고, 자기만의 답을 찾아 마지막 깨달음에 이르는 일종의 수행 과정으로 다가온다.
트라우마가 된 과거의 흔적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재우. 그는 결국 이처럼 복잡한 마음을 비워야 함에도 오히려 점점 더 채워 넣으며 자신도, 검도 흔들리게 만든다. 결국 이처럼 어둠으로 뒤엉킨 내면을 만든 원인 중 하나인 태수를 더더욱 이길 수 없게 된다.
검도는 '기검체일치'(氣劍體一致·검도에서 기와 검과 신체가 조화를 이룰 때 상대방에게 유효한 공격을 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의 무예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고, '자신'의 중심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묵상으로 시작해 묵상으로 끝나는 검도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내면이 혼란스러운 재우에게 홀로 '묵상'의 시간을 갖길 권유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다. 재우가 들끓는 내면의 소란으로 인해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외부로 눈과 마음을 돌리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재우의 내면을 상징하는 건 '오른손'이다. 영화 내내 오른손을 클로즈업하며 오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내 보여준다. 잔뜩 힘이 들어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내면, 즉 오른손의 힘을 풀어내는 것도, 검도에서 상대가 보인 잠시 잠깐의 빈틈을 향해 죽도를 찔러 승패를 가르는 것도 모두 찰나의 순간에서 시작된다.
재우의 내면을 대변하며 내내 어두운 기조를 유지했던 영화는 재우가 오른손, 즉 자신의 마음에 찰나의 틈을 주게 된 후 비로소 밝아진다. 감독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우가 만든 마음의 틈 사이로 하얀 세상을 안겨준다. 그리고 재우와 함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관객들 역시 마지막 재우가 오른손에 힘을 빼고 하얀 세상으로 나왔을 때 참았던 숨을 내쉬게 된다.
영화는 연출은 물론 찰나의 눈빛과 떨림, 숨결까지도 포착해 낸 촬영과 사운드 디자인 등 전 과정에서 섬세함과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첫 장편에서 탄탄한 짜임새와 감각적인 연출을 선보인 김성환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이며 완성된 '만분의 일초'는 관객들에게 올해 꼭 기억해야 할 영화, 꼭 봐야 할 영화가 되기에 충분하다.
100분 상영, 11월 15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