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국방 "한미일"에 "유엔사"…'평화' 없이 '힘'만 목청 높아져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박진 외교부 장관이 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열린 박진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회담 뒤 진행된 기자회견 내용은 매우 특이했다. 박 장관은 첫 번째에 '한미동맹 70주년', 두 번째에 '연합방위태세'와 '확장억제', 세 번째에 '이스라엘-하마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론했다. 통상 나오곤 하는 '경제 번영'은 4번째였다.

한미동맹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부터 시작된 군사동맹이다. 박 장관이 모두발언에서 꺼낸 내용 상당수가 군사안보 관련 내용인 셈이다. 물론 국제정치에서 통상 외교를 '첫 번째 옵션', 군사를 '두 번째 옵션'이라고 칭하듯 외교와 군사가 밀접한 연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를 감안해도 상당한 비중이다.

여기에 더해 군사안보를 직접적으로 관장하는 국방부도 13일 한미안보협의회의(SCM), 14일 한국-유엔사 국방장관회의를 열어 최근 현안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을 협의 테이블에 올린다.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매우 가까운 시기에 한미일 3국 국방장관회의도 예정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진 장관과 블링컨 장관도 기자회견에서 한미일 협력을 계속 강조하며 가까운 시기에 있을 3국 외교장관 회동을 예고했다. 연내 마무리하기로 약속한 미사일 경보 정보 실시간 공유를 강조했고, 박 장관은 취재진의 질문에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그런 태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덧붙였다. 언뜻 들으면 장소가 광화문의 외교부 청사인지, 용산의 국방부 청사인지 혼동될 발언들이었다.

처음으로 열리는 한-유엔사 국방장관회의도 이와 무관치 않다. 유엔사의 모체부터가 과거 한국과 일본을 모두 관할하던 미 극동사령부다. 지금도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7개 기지가 유엔사 후방기지로 지정돼 유사시 한국에 대한 증원병력이나 군수지원 등을 담당한다. 일본은 유엔사 회원국이 아니긴 하지만 유엔사를 논의하면서 일본을 빼놓기는 불가능한 이유다. 그만큼 일본의 협상력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통화하는 박진 외교장관. 외교부 제공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 참모들이 모두 '한미일 안보협력'과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면서 정작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할 '외교'의 모습은 사라졌다. 기본적으로 군대는 무력의 사용 또는 그 무력에서 나오는 억제력을 통해 국가전략과 정책을 뒷받침한다. 문민통제와 위기관리를 귀가 닳도록 강조하는 이유다.

물론 국제정세가 위험해졌고 이 때문에 군대가 주목받으며 군비경쟁이 심화하는 일이 생기는 점 자체는 간과하기 어렵다. 최근 냉전 말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재래식 무기 보유 목록과 수량을 제한하도록 체결한 군축 조약인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에 대해, 미국과 러시아가 각자 효력 중단과 탈퇴를 선언했다.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019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의 지속적인 핵무기 개발 및 배치를 빌미삼아 사거리 5500km까지의 미사일 배치를 제한하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탈퇴했다. 러시아는 올해 2월 전략핵무기의 수량을 감축하는 신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 참여 중단을 선언했고, 지난 2일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철회도 발표했다.

문제는 '힘'의 대립으로만으론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핵보유국 또는 핵무장국들이 핵으로 서로를 겨눌 때 재래식 무력분쟁이나 강대국의 대리전(proxy war)이 증가한다는 '안정-불안정의 역설(stability-instability paradox)'은 1999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르길 전쟁 이후로 국제정치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체 핵무장', '전술핵 재배치', '확장억제 강화'를 제각기들 거론하지만, 1973년 4차 중동전쟁은 핵무기 없는 나라인 이집트가 핵무장국인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카르길 전쟁의 당사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도 핵무장국이다.

결국 '외교'가 최우선이 되어야 하지만 지금의 형세는 외교관보다 군대가 전면에 나서서 주목을 받는다는 데서 위험하기 그지없다. 동유럽과 중동뿐만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담대한 구상'을 내세워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경제 지원을 약속했지만,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에 실은 대남 비난 기사를 당국자가 아닌 '김윤미' 개인 필명으로 쓸 만큼 남북관계 개선에 관심이 없다. 대신 러시아에 포탄을 가져다 주고 우주발사체, 즉 탄도미사일과 위성 관련 기술을 자문받고 있다.

영변 핵시설 등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저명한 핵물리학자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지난 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은 1990년대부터 2020년경까지 30년 동안 진정성 있고 진지하게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려 했지만, 외교를 추진하면서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핵개발을 하는 이중경로 정책(dual-track policy)을 추진했다"며, 북한이 이를 불가능하게 했던 여러 '변곡점(hinge point)'을 맞게 되면서 관계 개선을 포기하고 중국·러시아 쪽으로 돌아섰다고 설명했다.

문제의 '변곡점'은 2002년 2차 북핵 위기, 2009년 오바마 행정부 출범과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이다. 미국의 국내정치가 대북협상에 큰 영향을 끼친 뼈아픈 사례들이다. 결과는 외교가 실패한 자리에 군대가 서고, 북한이 고체연료 ICBM을 시험발사하기까지 하는 살얼음판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어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검토하고 있다. '힘에 의한 평화' 속에서 정작 '평화'의 자리는 사라지고, '한미일' 그리고 '유엔사'가 그 자리를 메꿨다. 우리 외교장관의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 상당수가 '군사안보' 관련 사항이었다는 사실이 우려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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