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얼마나 내고 받을지'는 빠진 연금개혁 로드맵을 내놓은 가운데 국민연금 개혁 지체로 인한 '연체료'를 미래세대의 부담(보험료 인상)으로만 떠넘겨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구체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를 투입해 연금재정 안전성을 확보하고 세대 간 형평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는 7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연금연구회 2차 세미나에서 GDP 1%에 해당하는 약 22조원을 연기금에 투입하는 방안을 담은 개혁안(案)을 제시했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GDP는 2161조 7700억여 원 수준이다.
김 교수는 이날 이른바 '3-1-1-5' 연금개혁을 주장했다. 현재 9%인 보험료율을 12%로 '3%p' 올리고, 실질적으로 거의 활용되지 않았던 정부 재정을 GDP 대비 '1%' 투입하고, 기금운용 수익률(4.5%)을 지금보다 '1.5%p' 올려 장기적으로 연평균 6%로 만들자는 구상이다.
그는 "GDP 1%인 22조원이면 큰돈이다. 지금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1200만~1300만 명 정도의 국민이 있는데, 이 돈이면 이분들께 최저임금의 한 60% 정도 되는 연금 보험료를 지급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득 재분배 등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의) 원래 사회보장적 기능을 달성하려면 국가 재정을 투입할 수 있는 것"이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이 부분의 연금재원은 정부 재정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부연했다.
국민연금은 전체 가입자의 3년간 평균 소득월액의 평균액을 뜻하는 'A값'을 기반으로 계층 간 소득 재분배 기능을 하는데, 이러한 저소득층 생계 지원은 애당초 정부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지적이다.
정부가 '게으름'을 부려 실기한 연금개혁의 부담이 국민, 특히 청년세대에게 전가되어선 안 된다고도 지적했다.
김 교수는 "물론 재정이나 보험료나 국민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건 똑같다. 그럼에도 (정부는) 지금 보험료 인상을 설득해야 되는 상황"이라며 "조금 더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보험료율·소득대체율 등 '모수(母數)'를 손보는 개혁이 5년 늦어질 때마다 재정 균형을 이루기 위한 부담은 GDP의 0.5%씩 증가한다며 "2007년 개혁 이후 16년간 지체된 개혁을 감안하면, GDP 1.5% 정도는 정부가 부담하는 노력을 먼저 보여야 국민이 개혁에 동의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재정 투입은 세금 인상이 아니라 '정부의 뼈를 깎는 노력'이 요구된다며 "최대한 기존 재정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김 교수는 주문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말 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 발표 당시 일각에서 '대안'으로 거론된 국고지원 가능성에 선을 그은 바 있다. 큰 틀에서 보험료 인상과 함께 해외투자 비중을 늘려 연기금 운용 수익률을 높이고, 보험료 납부가 어려운 가입자 지원을 통해 재정기반을 확충하겠다는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급여 지출에 필요한 비용은 수익자로부터 징수한다는 '수익자부담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저출산 등으로) 인구가 줄어든 미래세대는 보험료 폭탄에 세금 폭탄까지 맞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현 정부가 '고통 분담'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길게 보면, 미리 재정을 투입해 노후빈곤을 방지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란 점도 강조했다.
다만, 이날 세미나에선 연금재정과 국가재정 건전성이 '별개'가 아니라는 비판적 지적도 제기됐다.
박명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청년세대의 불안 해소를 위해 미래의 연금 지급 보장을 '명문화'하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 "'내(정부)'가 갚을 돈이 있을 때 그런 말에 신뢰성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많은 분들이 '현재 국가재정 상태가 양호하다', 'OECD 가입국 평균에 비해 양호하니 허리띠를 더 풀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의 고령화가 아직 선진국에 비해 많이 진행된 편이 아니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짚었다.
아울러 연기금이 현재 넉넉하다고 해서 '곶감 빼먹듯'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며 "어느 정도는 국가재정과 독립적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공적연금의 판매자이자 운영위원인 국가는 국민연금의 제도 지속가능성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도 "그냥 (무작정) 재정을 투입하는 게 아니다. 정부 재정을 투입한다면서, (결과적으로) 국가 채무가 되면 그건 (미투입 상태와) 똑같은 것"이라며 "기금이 고갈된 다음에 일반 재정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사회보장세 등을 거둬 미래를 위한 재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보장강화론 측의 주장처럼 '받는 돈'(소득대체율)을 올리는 것보다는 가입자들의 장기가입이 가능한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게 실질소득을 보장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가입기간을 넓히는 대신 지급률만 높이면 (직장이) 안정적인 정규직 남성들에게만 혜택이 집중된다"며 "과연 이게 국민연금의 목적이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정부가 정말로 의지가 있다면, '지금의 30대가 연금을 수급할 시점에는 가입기간을 유럽 평균인 35년 이상으로 만들겠다' 등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을 펴는 게 훨씬 더 국민을 위한 연금개혁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