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기업 결합이 또 하나의 큰 산을 넘었다. EU 경쟁당국으로부터 두 항공사 합병 승인을 받기 위해 아시아나항공 이사회가 자사 화물 사업을 매각하기로 의결한 것이다.
다만 아시아나항공 화물 사업 매수자를 찾아야 EU 측의 승인이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되고 미국과 일본 경쟁당국도 독과점 등을 이유로 여러가지 요구를 할 가능성이 커서 양사의 합병 완료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 매각의결"…대한항공 "유동성 지원" 화답
아시아나항공은 2일 오전 이사회를 열고 화물사업 분리 매각을 의결했다.앞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 결합을 심사하고 있는 EU 집행위원회(EC)는 양사 합병시 유럽 화물 노선 독과점이 우려된다며 시정 조치를 요구했다. 이에 대한항공은 유럽 4개(파리, 프랑크푸르트, 로마, 바르셀로나) 노선에 국내 항공사(remedy taker)가 진입할 수 있도록 지원 방안(이를 위한 Entry Commitment Agreement 체결 포함)을 마려나고 아시아나항공 화물 사업을 매각하는 내용을 담은 시정조치안을 마련했다.
대한항공이 이런 시정조치안을 EC에 제출하기 위해서는 아시아나항공의 동의를 받아야하는데 아시아나항공 이사회는 격론 끝에 시정조치안 제출에 동의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30일 열린 임시 이사회와 이사회에 앞선 논의에서 이사진 중 일부는 배임 가능성 등을 제기했지만 유동성에 대한 우려와 산업은행 등 채권단의 압박이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항공은 "이번 결정이 남은 합병 과정에 긍정적 모멘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아시아나항공에 유동성 공급을 약속했다. 대한항공은 1조5천억원 규모의 아시아나항공 신주 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EC에 시정조치안을 제출 뒤에는 대한항공이 앞서 지급했던 계약금과 중도금 7천억원을 아시아나항공이 운영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로 했다. 아울러 아시아나항공에 발행한 영구전환사채 3천억원을 낮은 이자로 차환하고, EC가 합병을 승인하면 인수계약금 중 1500억원을 이행보증금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대한항공은 내년 1월 말까지 EC로부터 합병을 승인받은 뒤 내년 초 미국과 일본의 경쟁당국에서도 합병 승인을 받겠다는 계획이다.
시장 나온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 적격 매수자 있나
아시아나항공 이사회가 화물사업 매각안을 승인하면서 대한항공은 한숨을 돌렸지만 최종 합병까지는 크고 작은 산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EC가 '합병 승인' 대신 화물 사업부 매각을 전제로 한 '조건부 승인'을 한다면 매각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 합병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해소되지 못한다.
일단 화물사업부를 살만한 국내 기업이 있느냐가 직면한 과제다. 항공 화물 운송은 고가의 IT기기나 바이오 의약품 등을 주로 나르는데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요가 급감하고 있다. 2021년 3조원까지 치솟았던 아시아나항공 화물 매출은 올해 상반기 7795억원을 기록하며 4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여기에 인수 기업은 1조원가량으로 예상되는 화물사업 관련 부채도 떠안아야 한다.
앞서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부 매각을 위해 삼정KPMG를 매각 자문사로 선정하고 예비입찰을 진행했는데 저비용항공사(LCC) 1위인 제주항공은 처음부터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고,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했던 2위인 티웨이도 인수전에 참가하지 않는 방향에 무게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기업들은 여객기 10대 미만의 중소형 LCC로 업계에서는 이들이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을 인수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을 인수하는 기업이 고용 유지와 처우 개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이날 고용승계·유지 조건으로 화물사업 매각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공시한 상태다. 다만 구체적인 지원 내용 등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어서 얼마나 많은 매수자가 화물사업 인수에 뛰어들지는 미지수다.
美.日 경쟁당국, 추가 노선 반납 요구 가능성…내부 반발도 변수로
대한항공은 EU 합병 승인에 한층 다가섰다고 평가하며 상대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합병 승인을 낙관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합병 과정이 3년 가까이 이어지는 상황을 감안하면 이 역시 장담할 수는 없다.
이날 아시아나항공 이사회 의결 직후 대한항공은 이에 대한 환영의 뜻을 전하며 "EU 경쟁당국에 시정조치안 제출을 완료하고 내년 1월 말 심사 승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미국 경쟁당국과 일본 경쟁당국과도 시정조치안 협의가 완료되는 대로 정식신고서를 제출해 내년 초 심사 종결을 목표로 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일단 EU 등 다른 나라 경쟁 당국의 전례를 감안하면 미국과 일본 경쟁 당국 역시 합병 승인을 위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노선을 추가로 경쟁사에 넘기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반독점 행위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지난 5월 현지에서는 미국 법무부가 "미주노선 시장경쟁을 막는 독점이 발생하는 만큼 합병 승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소송까지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노동계도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는 이날 아시아나항공 이사회 결정에 대해 "대한항공 독점 강화, 아시아나항공 해체로 가는 길이 열렸다"며 "오늘 결정으로 아시아나항공 화물기 11대가 사라지고, 유럽 핵심 노선 슬롯이 반납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항공산업의 핵심 자산이 내팽개쳐지는데 산업은행은 오히려 합병을 압박하고 국토교통부는 대한항공 독점 강화를 방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나항공 노조(일반노조)와 다수 조종사노조인 조종사노조(APU), 소수 조종사노조인 열린조종사노조도 화물 사업 매각에 대해 고용 불안 등의 이유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왔다. 일반노조는 EU 집행위 측에 반대 서명지도 전달할 예정이다.
합병의 득실 논란도 여전하다. 아시아나항공의 막대한 부채 규모를 감안하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화물사업 매각과 노선·슬롯(공항 이착륙 횟수) 축소 등을 감안하면 합병을 통해 경쟁력이 오히려 악화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대한항공이 국제노선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면서 항공권 운임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편 아시아나항공 이사회에 대한 압박을 이어온 산업은행은 이날 아시아나항공 이사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냈다. 산은은 "이사회 결정에 따라 EU 경쟁당국에 시정방안을 제출한 이후부터는 경쟁당국보다는 양사의 이행 노력에 심사 결과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며 "산은도 조속한 심사 종결을 위해 양사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