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31일 국회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 시정연설을 통해 '건전재정' 기조를 설명하고 '민생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이번 연설에서는 국회의 초당적 협력을 요청하며 여야 협치 메시지에 공을 들였다. 아울러 여야 원내대표 및 국회 상임위원장단과 간담회, 오찬을 함께하며 경청과 소통에 방점을 찍는 모습도 보였다.
윤 대통령은 이날 취임 후 세 번째 국회 시정연설에서 "정부는 물가와 민생 안정을 모든 정책의 최우선에 두고 총력 대응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어 "범정부 물가 안정 체계를 가동해 장바구니 물가 관리에 주력하는 한편, 취약계층의 주거, 교통, 통신 등 필수 생계비 부담을 경감하고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민생 안정 대책을 촘촘히 마련해 나가겠다"며 "서민 금융 공급 확대를 통해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부담 완화 노력도 강화하겠다"고 했다.
이번 연설의 핵심 내용은 무엇보다 '민생 경제'였다. 약 27분 간 진행된 연설에서 '경제'는 23회, '민생'은 9회, '물가'는 8회 언급됐다.
윤 대통령은 정부의 재정 운용 기조인 '건전재정'에 대해선 "단순하게 지출을 줄이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없이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내년 총지출은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인 2.8% 증가하도록 편성했고, 내년도 예산안 편성과정에서 총 23조 원 규모의 지출을 구조조정했다고도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모든 재정사업을 '제로 베이스'에서 검토했다며 이를 통해 마련한 재원은 국방·법치·교육·보건 등 국가 본질 기능 강화와 약자 보호,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더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R&D(연구개발) 예산에 대해 지출 구조조정을 해서 마련된 3조 4천억 원은 약 300만 명의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을 더 두텁게 지원하는 데 배정했다"고 했다. 연설 전체에서 '약자'와 '취약계층'은 각각 4회 언급하는 등 '약자 보호'에 특히 방점을 찍기도 했다.
尹, 국회 향해 '초당적 협력' 강조…野 협치 방점
윤 대통령은 연설에서 국회의 '초당적 협력'을 강조하며 야권을 향해 협조를 거듭 요청했다.정부의 핵심 과제인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에 대해선 "의원님들의 깊은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리겠다"라고 했고, 내년도 예산안과 관련해선 "차질 없이 집행되어 민생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도록 국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지금 우리가 처한 글로벌 경제 불안과 안보 위협은 우리에게 거국적, 초당적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며 "당면한 복합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연설문을 초안부터 직접 뜯어 고친 것으로 전해진다. 가장 큰 특징은 평소 윤 대통령의 공개 발언과는 달리 지난 정부에 대한 언급이나 비판이 빠졌다는 것이다. 참모들이 준비한 초안에는 문재인 정부의 방만 재정 등 문제점이 담겼지만 윤 대통령이 "지난 정부에 대한 언급은 싹 드러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연설문 초안을 검토하면서 해당 내용이 수정됐다"며 "협치에 방점을 찍는 자세로 예산안 협조를 구한다는 취지"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연설을 위해 본회의장에 입장하면서도 야권을 향한 협조 제스처를 취했다. 맨 뒷줄에 있던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와 이재명 대표의 순서로 악수했으며, 연단으로 이동하면서도 통로 쪽 의석에 앉아있던 민주당 의원들 위주로 악수했다.
연설을 시작하면서도 통상 여야 순으로 호명하는 정치권의 관례를 깨고 이 대표를 먼저 언급하고 원내대표 역시 민주당과 국민의힘 순으로 호명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통상 여야 순으로 소개하는데 이번에 관례를 깬 것이 포인트라고 볼 수 있다"며 "그만큼 협치를 강조한 것이라 해석하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 연설 동안 박수는 29번 나왔다. 다만 야당 의원들은 침묵을 지켰다. 단상에서 내려온 윤 대통령은 이 대표를 포함한 여야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한 뒤 퇴장했다. 야당 의원들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었고, 여당 의원들은 기립 박수를 이어갔다.
尹, 5부 요인 및 여야 지도부 만나…李 첫 소통 자리
윤 대통령은 연설에 앞서 5부 요인 및 여야 지도부와 사전환담을 하는 등 소통 행보를 보였다. 특히 현 정부 출범 후 윤 대통령과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공식 석상에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갖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관심이 쏠렸다.
윤 대통령은 미리 환담장에 도착한 이 대표에게 "오셨어요?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하며 짧게 악수했고, 이 대표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별도 답변은 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환담 모두발언에서 "국회는 오늘로 3번째 왔지만, 우리 상임위원장들과 다 같이 있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며 "정부의 국정운영, 또는 국회의 의견 이런 것에 대해서 좀 많은 말씀을 잘 경청하고 가겠다"고 말했다.
상임위원장들은 윤 대통령에게 소관 분야의 현안에 대해 설명하고 건의사항을 전달했다고 이도운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윤 대통령은 일부 건의 등에 대해 즉석에서 답변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위원장님들의 소중한 말씀을 참모들이 다 메모했을 뿐만 아니라 저도 아직은 기억력이 좀 있기 때문에 하나도 잊지 않고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며 "국정운영과 향후 정부 정책을 입안해 나가는 데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잘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오늘 이 자리가 국회의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장면으로 기억될 것 같다"며 "이런 만남을 정례화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윤 대통령은 한 상임위원장이 "술 한잔하면서 대화하니 여·야가 없더라"라고 한 발언을 인용하면서 "저녁을 모시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간담회 참석자들과 사랑재로 걸어가 오찬을 함께했다. 오찬을 시작하면서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의사소통 만사형통 운수대통'이라고 건배사를 했고,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라는 의미로 '소화제'라고 말하며 건배를 제의했다고 이 대변인은 전했다.
윤 대통령은 오찬에서 "국회에 와서 우리 의원님들과 또 많은 얘기를 하게 돼 저도 취임 이후로 가장 편안하고 기쁜 날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우리가 초당적, 거국적으로 힘을 합쳐서 국민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모두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 대변인은 "대통령이 국회에서 상임위원장들과 간담회를 가진 것은 역대 처음이라고 국회 관계자가 말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