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로 떠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발걸음이 무겁게 됐다.
당초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방문한 뒤 요르단을 찾아 가자지구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자위권 차원에서 하마스 축출은 용인하지만, 이 과정에서 헤즈볼라의 개입 등으로 '중동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을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또한 이미 수십명의 미국인이 이번 사태로 숨진 상황에서, 현재 가자지구에 갇힌 민간인 대피에 대해서도 팔을 걷어붙여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미국은 요르단 국왕, 이집트 대통령,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4자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요르단의 요청으로 이같은 계획이 전격 취소됐다.
이는 이스라엘군이 17일(현지시간) 오후 가자지구의 한 병원을 공습해 최소 500명이 숨졌다는 BBC 등의 보도가 나오면서 중동 국가들의 분노가 치솟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다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무관하며 이번 공격은 하마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7일 하마스의 공습 이후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지만, 동시에 이번 무력 충돌이 '확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막아야하는 입장에 서있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이스라엘까지 '2개의 전선(戰線)'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되기 때문이다.
현재 장기화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중러가 밀착되고 있는 것도 골치가 아픈데 여기에 중동 위기까지 겹친다면 자신의 '외교적 리더십'도 시험대에 오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이들 4개국 정상들에게 하마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하고, 현재 가자지구에 갇힌 민간인들의 대피에도 전폭적인 협조를 구할 예정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동안 하마스와 나머지 팔레스타인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 왔다. 이번 순방에서도 중동 국가들에게 '하마스 고립'에 대한 당위성을 설파할 예정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팔레스타인 자지정부 압바스 수반과의 만남이 주목됐다. 팔레스타인 정파 중 온건 노선을 걷고 있는 파타당은 무장정파 하마스와는 태생부터 서로 결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은 '병원 공습'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요르단 방문 일정을 조기에 마치고 서안으로 돌아갔다. 이번 공습으로 인한 팔레스타인 희생자에 대한 3일간의 애도 기간도 선포했다.
'병원 공습'이라는 돌발 상황이 없었어도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순방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미국이 이미 이스라엘 편에 서서 이번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는 불신이 깔려있는 탓에 중동 국가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도 벌어지고 있다.
앞서 대통령 특사로 중동 순방을 벌였던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해당 국가들에서 환대를 받지는 못했다.
미국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미국의 치열한 전시 외교가 현재까지는 중동의 아랍 국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며 "바이든 대통령의 방문이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병원 폭발이 발생하기 전부터 성급하게 만들어진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방문은 외교적, 정치적, 안보적 위협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중동 이슈에 큰 관심을 쏟지 않는 일명 '조용한 외교'를 지향해 온 것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AP는 "닉슨 대통령부터 미국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설득하며 75년간 중동 내 긴장감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중국·러시아 견제에 집중하고 중동 문제를 등한시한 바이든 행정부의 자업자득이라는 평가인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전쟁 지역을 찾은 것은 지난 2월 우크라이나 키이우 방문 이후 이번이 두 번째지만, 중동방문은 시작부터 빛이 바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