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가 '송강호'했다.
영화 '거미집'에서 송강호의 연기는 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고, 이 한 줄로 표현된다. 송강호는 매 작품 송강호만의 새로움을 보여준다. 익숙한 듯하면서 색다른 얼굴을 선보이는 송강호의 연기는 왜 '송강호'여야만 했는지를 새삼스러우면서도 놀랍게 증명한다.
송강호가 연기한 캐릭터만으로도 한국 현대 영화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다양한 작품에서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해 왔다. 일상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듯 익숙한 얼굴부터 그 익숙함 안에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담아낸다. 특별함 속에서 보편성을 잃지 않는 모습도 선보였다. 그런 그가 '거미집'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카메라 뒤에 선 '감독'을 연기했다.
송강호는 이번 영화에서 대본부터 검열받아야 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기필코 걸작을 만들고 싶은 욕망과 부족한 역량 사이에서 번뇌하는 김열 감독을 연기했다. 회의와 자학, 열정과 재능, 자본의 논리, 그 사이 부딪히는 욕망들, 그럼에도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순간까지…. 송강호는 '영화 만들기'라는 예술의 과정 속 역동적인 장면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자신의 연기를 두고 늘 '정답 아닌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표현한 송강호에게 '거미집'과 김열 감독에게서는 또 어떤 정답 아닌 정답을 찾고자 했는지 물었다. '거미집' 속 김열 감독의 치열한 현장과 달리 송강호 특유의 웃음소리가 여백과 여백 사이를 빼곡하게 채우는 유쾌한 인터뷰 현장이었다.
영화만의 강렬한 맛, 김열이라는 보편적 인간
송강호가 '거미집'을 처음 보고 반했던 지점은 바로 '장르'다. 그간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앙상블 코미디'다 보니 호기심과 매력을 느꼈다.
그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만 엮어 보여주는 게 콩트와 같은 느낌이라면, 피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욕망 속 허우적대는 수많은 인간군상을 통해 결국에는 영화 속 영화가 끝나고 실제 영화가 끝났을 때 보이는 영화의 메타포가 참 좋았다"며 "그게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렬한 맛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대부분 배우가 '배우'를 연기한 데 반해 송강호는 '감독'을 연기했다. 그는 김열 감독에 관해 "열등감과 일류 감독이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로, 끊임없이 자기 능력을 의심하고 좌절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며 "보편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김열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많고, 나 스스로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특정한 영화감독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열을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들을 보여 주자는 데 방점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어쩐지 송강호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열등감'이단 단어지만, 그 역시 열등감은 "항상 있다"고 했다. 송강호가 "잘생기고 멋진 배우들을 보면 움츠러들고 열등감이 생긴다"고 웃으며 말하자, 한 기자는 "정우성씨가 나왔을 때도 그랬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송강호는 "그래서 영화 속에서 주눅 들어 있잖나"고 농담을 던진 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다. 자기보다 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열등감이 생긴다. 그게 자연스러운 열등감인 거 같다"고 했다.
이처럼 복합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정을 지닌 김열을 연기하기 위해 송강호가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의외로 김열이 아닌 '영화'의 외형이었다. 김열도 김열이지만, '거미집'이란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으로 다가가야 가장 효과적이고, 감독과 배우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새로운 영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앙상블 연기가 빛을 발하려면 무엇이 중요할 것인가. 전 배우들과의 리듬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리듬감을 어떤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이맥스를 거치며 엔딩까지 갈 수 있는지 전체적인 리듬감을 생각했죠. '거미집'이란 작품 자체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소통되고 다가갈 수 있는지, 그런 쪽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았어요. 그 속에 김열이 있는 거죠."
집요하고 진중한 김지운 감독
비록 연기지만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현장에 섰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일 테다. 송강호는 "영화 속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직접적으로는 수십 년을 연기하면서 느꼈는데, 참 보통 자리가 아니구나 싶었다"고 했다.
보통 자리가 아닌 감독, 그것도 김지운 감독과는 '조용한 가족' '반칙왕'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에 이어 '거미집'으로 다섯 번이나 함께했다. 송강호가 본 김지운 감독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똑같았다. "집요하면서도 진중하다. 영화 촬영 모든 단계가 침착하면서도 정말 집요하게 찍는다. 그래서 좋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런 집요함이 있기 때문에 항상 김지운만이 갖고 있는 스타일과 영화적인 미장센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 속 김열 감독에게 김지운 감독 모습을 투영한 것이 있는지 묻자 "마지막 플랑 세캉스(plan-sequence, 한 신이나 시퀀스가 하나의 쇼트로 이뤄지는 것)의 결론에 이르러 막 광기에 차서 김열이 '잘 찍혔지?' 이러는 건 실제 '놈놈놈' 촬영장에서 본 적 있다"고 했다.
이어 "그때는 모두가 다 광기의 도가니였다. 중국 사막에서 100일 동안 촬영했는데, 내일은 무조건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찍을 분량은 많이 남아 있다 보니 패닉에 빠졌다. 중간에 위험한 장면을 찍었을 때, 모든 노력이 그 필름에 담기길 원했는데 이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될까 봐 그런 광기가 저절로 나왔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우리는 큰 수정, 작은 수정 그랬는데 '투 수정'뿐 아니라 전여빈, 장영남의 재발견이 놀랍지 않았나?"고 반문한 후 "오정세야 워낙 재능이 출중한 배우고, 모처럼 영화하신 박정수 선생님도 신선한 연기와 함께 반가운 얼굴이었다. 모든 배우가 다 좋았다"고 말했다.
송강호와 韓 영화 자부심의 비결은 '정답 아닌 정답' 찾기
1970년대, 꿈도 예술도 검열당하던 시대. 그럼에도 지금은 볼 수 없는 현장의 낭만이 존재했던 시대. 송강호는 간접적으로 경험한 1970년대를 두고 "티격태격 싸워도 인간적인 정이 있다"고 표현했다.
그러한 인간적인 애정과 살벌함이 공존하는 현장 속에서 송강호가 가장 특별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무엇일까. 그는 "백 회장(장영남)이 일본에 가려다 다시 돌아와서 영화 현장을 난장판으로 만들 때"라고 꼽았다. 이어 "장영남의 놀라운 연기도 백미였지만, 김열 감독의 모습을 통해 모멸감 앞에서 자존감이 무너지는 예술가를 봤다. 대사 한마디 없이 다 떠나버리는데, 김열 감독이 혼자 있는 외로움이야말로 영화의 상징적이 모습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답을 적으면 안 된다'는 말장난 같은 대답이다. 우리 머릿속의 정답을 보여주면 정답은 정답이되 감동이 없다. 우리가 모르는 정답을 내야 하는데, 그게 정답이어야 하는 거다"라며 다시 한번 특유의 소리로 "아하하하하학"하며 더욱더 크게 웃었다.
"박찬욱 감독님이 23년 전에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송강호는 정답이 아닌 정답을 적었는데 알고 보니 정답보다 더한 정답이더라. 김지운 감독님은 그 전에 인터뷰에서 제 연극을 봤는데 '이상하게 '께림칙'하다. 저 사람은 왜 연기가 '께림칙'하지?'(*참고: 송강호는 '꺼림직'이 아니라 '께림칙'이라고 해달라고 강조했다) 하셨대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 내가 알고 있는 정답이 아닌 걸 보여주니 '께림칙'한 거예요. 다 같은 이야기죠. 그게 가장 기본적으로 후배들에게 이야기하는 모토예요."
그는 "우리가 관객에게 내가 알고 있는 정답을 내밀었을 때 고개는 끄덕하지만 감동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 이게 뭐야?'라며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을 울린다고 한다면 그게 가장 큰 정답 아닐까"라며 "정답 아닌 정답을 찾는 과정이 영화의 의미고, 한국 영화의 자부심도 거기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거대한 지구상에서 이 조그만 나라가 이런 역동적인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늘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도전을 하기 때문"이라며 "그런 것이 한국 영화의 자부심 아닐까?"라고 했다. 그러면서 '거미집'이야말로 한 발짝 내딛는 영화라고 강조했다. 그러면, 정답 아닌 정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선 '거미집'은 어떤 장르의 영화라고 불러야 할까? 그가 정답을 내놨다.
"괴기스럽지만, 종합선물세트 같은, 그런 유쾌한 장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