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친 지난 3년 사이, 글로벌 기업을 위시한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콘텐츠가 파고들었다. 영화가 코로나 이전에 멈춰선 채 위기를 거듭할 때 OTT는 날개 단 듯 관객들 사이를 누비며 생태계를 뒤바꿨다. 영화계의 '위기'가 찾아왔다.
영화란 무엇인지, 극장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거듭됐다. 영화 '잠' 제작사 루이스픽쳐스 김태완 대표 역시 이러한 고민과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변화한 세상에서 제작자도, 영화도 변해야 했다. 그렇게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와중에 발견한 게 '생활필수품형 영화'다. 유재선 감독과 함께한 '잠' 역시 그가 고민 끝에 다다른 '생필품형 영화'다. 그리고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건 '해무' '인랑' '소리도 없이' 등의 제작 경험에 더해 루이스픽쳐스 이전 봉준호 감독의 '옥자'로 경험한 할리우드 시스템이다.
과연 김 대표가 고민하고 있는 영화 제작과 기획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찾아낸 생필품형 영화와 공학적 기반이란 무엇인지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관객의 눈높이는 변했고, 제작자의 눈도 변해야 한다
▷ '옥자'를 통해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과 현장을 경험하면서 가져오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할리우드에서 가져오고 싶은 건 시나리오 개발 시스템이다. 워낙에 비싼 영화를 만드는 동네이다 보니 시나리오에 대해 여러 가지 공학적 기반을 갖고 강박적으로 파는 면이 좀 있다. 이제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가 글로벌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도 할리우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영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이론적 혹은 공학적 기반이 스토리에 들어가 있는지를 한국 영화에도 접목해야 한다고 본다.
▷ '잠'에도 그런 방식이 적용된 건가?
그게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잠'만 해도 처음에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봤을 때는 재밌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시나리오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아는 상태에서 일주일 있다가 다시 보면 '그렇게 재밌는 건 아닌가?'란 생각을 슬쩍 하게 된다. 어떤 제작사든 간에 '내가 그때 봤던 건 환상인가?'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보는 눈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왜 작동하는지 이론으로 알면, 그러니까 기계의 구조를 공학적으로 알듯이 보면 어떤 이유에서 폭발력이 있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시나리오 비전과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할 수 있게 되는 힘을 갖는 거다. 좋은 물건을 알아보고 끝까지 그 물건을 지킬 수 있으려면 이러한 방식이 필요한 것 같다.
▷ 조금 전에 한국 관객의 눈높이가 글로벌에 세팅돼 있다고 말했는데, 언제부터 이러한 변화를 감지한 건가?
코로나로 인해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가 자리를 잡으면서 글로벌 수준의 콘텐츠를 터치 한 번이면 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관객들은 집에서 편하게 또는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콘텐츠를 본다. 그런데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려면 1만 5천원을 내야 한다. 사람이 돈을 지불할 때는 고통을 느낀다고 하더라. 그걸 감수하면서도 보려면, OTT보다 재밌거나 뭔가 얻어가는 게 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전까진 OTT가 없었기에 프리미엄 콘텐츠를 사서 소비할 수 있는 건 '극장'이란 등식이 있었는데, 글로벌 수준의 콘텐츠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다른 옵션이 생긴 거다. 그렇게 관객의 눈높이가 글로벌로 영점 조준(정밀 사격을 통해 소총 따위의 조준점과 탄착점이 일치하도록 가늠자와 가늠쇠를 조정하는 일)이 된 상태로 세상이 변한 거다.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 생필품형 영화
▷ 실제로 관객들은 이른바 '극장용 영화'와 'OTT용 영화'를 나누고 있다. 제작자 입장에서 '극장용 영화' 혹은 '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는 어떤 영화라고 생각하나?
한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사실 우리나라는 마블 영화나 '탑건: 매버릭' 급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나도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식으로 제작 차원에서 접근해야 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해봤다. 내 나름대로는 '생활필수품형(생필품형) 영화'라는 생각을 해봤다. 생필품은 1만 5천원이 넘더라도 써야 하는 돈으로 인지한다. 티켓값이 소확행으로 소비할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섰다.
그렇다면 생필품 수준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라고 한다면, 일단 기획에서 관객들이 지금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고민하는 이슈를 말하고 있는가가 보여야 한다. 그러한 고민거리에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게 확실하게 서 있는 영화가 '생필품형 영화'라고 본다. 우리 PD들한테도 우리는 생필품형 영화를 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기존 작품 중 '생필품형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게 어떤 게 있을까?
'기생충'이 그렇다. '기생충'은 기발한 기지를 발휘해 계급을 극복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기획이다. 이에 대해 충실하게 답을 내주기도 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1300만 관객이 봤다. 계급은 시대를 넘어 끊이지 않는 고민일 것 같다.
'극한직업'도 '범인을 잡을 것인가 닭을 잡을 것인가'라는 카피가 다 했다고 생각한다. 형사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경제적인 부는 포기하고 하는 일이다. 그런 형사가 어느 날 자신에게 전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을 만들 수 있는 마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순간 여태까지 외쳤던 사회 정의 신념은 다 변명이었나, 그냥 눈 한 번 딱 감으면 돈 벌 수 있는데, 이 딜레마 안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코미디 영화를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할 수도 있지만, 난 그런 것들이 '생필품형 기획'이라고 보는 거다. 약간 오버를 합쳐서 그런 기획을 보면 관객들은 나도 모르게 표를 살 것이다. 내 생존에 필요한 이야기이고, 그 딜레마에 나도 언젠가 빠질 수 있고, 심지어는 내가 지금 느끼는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획을 완결성 있게 담아내는 게 영화다. 2시간만 투자하면 주인공이 내리는 결론을 보며 나는 어떤 걸 가져갈지 얻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 그럼 점에서 '잠'도 생필품형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인 오스틴 시절의 소설 때부터 그렇지만, 로맨스 영화라는 게 서로 다른 계급이든 성격이든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하거나 사랑을 이루는 게 클라이맥스이고 엔딩이잖나. 그런데 '잠'은 아니다. 서로한테 약속한 사랑을 이런 난관에서도 지켜낼 수 있는가, 관계를 지켜낼 수 있는가가 기획이고, 주제고, 이야기다. 지금 관객들이 고민하고 있는 생존에 필요한 지혜다. 그래서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도 관객들한테 어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앞으로 제작자의 길을 가면서 이것만은 놓치지 않고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간단한 이야기일 거 같다. 우리 모두가 스토리텔러고, 스토리텔링을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얼마나 크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잊지 말자는 건 간단하면서도 되게 중요한 지점이다. 난관이랄 것까지 없겠지만 그런 게 어려움이 있어도 돌파해 나갈 힘을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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