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수천명이 日바다에 침몰한 '오늘'…80대 유가족의 호소[이슈시개]

'우키시마호'. 메이플러스 제공

"78년 동안 우리 정부는 뭐 했습니까. 언론도 책임이 있어요. 정부가 눈을 안 뜨면 뜨도록 만들어야지. 유족들도 다 세상 등지고 한 둘이서 고함 질러봐야 안 되는 거야."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쯤,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항에서 의문의 폭발로 배가 침몰해 탑승해있던 조선인 수천여 명이 바다에서 숨지고 사라졌다. 일제 패망 직후, 일본에 강제동원 됐던 우리 국민들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갈 예정이던 첫 귀국선 '우키시마호'였다.
 
1945년 9월 1일, 일본은 조선인 3754명,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었고, 이 가운데 조선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희생자 측은 조선인 승선자 수가 8천 명에서 많게는 1만여 명, 사망자 수는 2천여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또, 일본은 미군이 설치한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고 사고 원인을 공식 발표했다. 생존자와 유가족, 목격자들은 기뢰가 아닌 '내부 폭발'이라고 주장했다. 4730t 군함인 우키시마호에서 해군으로 근무한 일본인이 기관실 옆 창고에 폭탄이 설치돼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강제징용자 승선 장면.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캡처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한석희씨의 아들 한영용(81)씨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그간 유가족으로서의 활동과 78주기를 맞은 소회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일본에 끌려간 당시, 한씨의 나이는 세 살. 침몰하던 배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동네 어른 유경수씨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은 뒤, 한씨는 1970년부터 50여년이 넘도록 사건의 진실을 좇다보니 우키시마호 희생자유족회까지 이끌게 됐다. 하지만 유가족들마저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아지고, 한씨도 고령이 되자 마음이 조급하다.

일본이 사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표한 우키시마호 사몰자 명부 일부. 1945년 9~10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돼 신뢰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한영용씨 제공

"7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이 일제 피해자 사망자 명부를 보내오면 극장이나 예식장에서 설명회를 열었다고, 그럼 유가족들이 많이 모였지. 그때 정부는 뭐 했나, 일제 피해자들 돌보기나 했냐 말이야."
 
한씨는 특히나 우키시마호 사건에 정부의 관심이 소홀하다고 개탄했다. 그는 1991년 우키시마호 피해 유족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냈다. 이듬해에는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 등 8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교토지방법원에 28억 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일부 승소라는 1심 판결에만 10년 세월이 걸렸고, 이마저도 2003년 오사카고등법원에 의해 뒤집혔다. 재판부는 "우키시마호로 한국인을 수송한 것은 치안상의 이유에 의한 군사적 조처"라며 "당시의 법 질서 아래서 정부는 피해자에게 민법상 불법 행위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후 2004년 최고 재판소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2심 판결을 확정했다. 
 
한씨는 일본에서의 재판을 회고하며 "우리 정부 측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재판을 하든지 말든지 그랬던 것 같다"라며, "얼마나 죽었는지, 뭘 하다 그렇게 됐는지, 유골을 찾아올 생각도 없는 정부"라고 비판했다.

한영용 우키시마호 희생자유족회장이 2012년 일본의 '우키시마호 순난자를 추모하는 모임'에 보낸 편지. 한영용씨 제공

한영용씨는 일본을 상대로 한 재판 패소 이후에도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씨는 일본 시민단체 '우키시마호 순난자를 추모하는 모임'에 편지를 보냈다. 마이즈루시에 있는 '순난자의 비'를 '희생자의 비'로 비문을 고쳐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바다에서 억울하게 죽은 우리 국민들을 '순난자'라고 할 수 없지요. 그렇게 한순간 죽을 줄도 몰랐는데, 일본을 위해서 죽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한영용 우키시마호 희생자유족회장이 2001년 당시 행정자치부에 우키시마호 사건 사망자 인적사항과 유족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질의를 보냈지만, 행정자치부 측은 확인 불가 및 관할 부서 해당 없음이라고 답변해왔다. 한영용씨 제공

우키시마호 인양은 1950년, 1954년 두 차례 이뤄졌다. '유골을 원형 그대로 보존 회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양해달라'는 조일우호협회의 요청을 묵살하고, 일본 정부는 다이너마이트로 선체를 폭파한 뒤 인양했다. 그 과정에서 인양된 유골은 모두 화장됐다.
 
한씨는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유골이 유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그는 2001년 당시 행정자치부에 희생자 인적사항과 유족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했지만, 전산 자료가 없고 관할 부서가 아니기에 어렵다는 답변만 받았다. 2012년에는 직접 사건 현장인 마이즈루만을 찾아 사비로 일본 잠수 전문가들을 고용해 수색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 마이즈루만에 3m가량 뻘이 쌓여 있었고 선체 일부가 떠있기도 했는데, 우리 정부가 유골 발골 조사도 안 했죠. 일본인들이 찾아낸 유골도 아직 일본에 있는데 모셔올 생각도 않으니 추모공원은 먼 얘기고요. 기자 분은 학교 다닐 때 우키시마호 라고 공부했습니까? 오늘이 78주기 그런 날인지도 모르는 국민이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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