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던 '도리마'(通り魔, 길거리의 악마). 길에서 여러 시민을 무차별 살해하는 범죄를 일본에서 부르는 말이다. '신림 흉기 살인' 사건 이후, 이제 한국도 '도리마'의 칼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묻지마 범죄'는 범죄의 동기가 뚜렷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를 의미한다. 대검찰청은 묻지마 범죄의 요건으로 △특별한 동기 없이 불특정한 다수에게 행해질 것 △피해자와 가해자가 사회적인 상관성이 없을 것 △폭력성향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묻지마 범죄'는 '도리마'라는 별도의 용어를 낳을 만큼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2008년 6월 '아키하바라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도쿄의 한 교차로에서 2톤 트럭 한 대가 신호를 위반하고 돌진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행인 5명을 들이받은 뒤, 행인과 경찰을 포함한 14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7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다. 당시 범인은 "승자는 모두 죽여버리겠다"며 특별한 동기 없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해 10월에도 오사카에서 실직한 40대 남성이 "사는 게 싫다"며 별다른 동기 없이 시내 DVD방에 불을 질러 16명이 숨졌다.
앞서 2005년에도 가가와현에서 백주 대낮에 식당 주차장에서 한 남성을 살해한 범인은 당시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고 (범죄 대상이) 누구라도 좋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제 비단 외국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묻지마 범죄'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지난 5일에도 경기 의왕시의 한 아파트 승강기에서 2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다짜고짜 주먹으로 여러 차례 때려 다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5월 부산 금정구에서 일어난 '정유정 살인 사건'도 '묻지마 살인'으로 볼 수 있다. '자녀의 과외 교사를 구한다'며 피해여성에게 접근해 살해한 정유정은 "극단적 선택을 하고 싶은데 혼자 죽기는 너무 억울해 같이 죽을 사람을 찾아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신림 흉기 살인' 사건 또한 '묻지마 범죄'로 분류된다. 경기대학교 이수정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지난 27일 출연해 "평균적인 자기 또래 남성들 모두가 결국은 자신에게는 적대시되는 대상이었다고 이야기 하는,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범행 동기, 이게 어떻게 보면 가장 전형적인 묻지마 살인의 특징"이라며 "극도로 반사회적이고 터무니없는 동기로 그야말로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이런 행위"가 바로 묻지마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번 '신림 흉기 살인'이 더욱 논란이 된 것은 더욱 잔혹해지고, 더욱 치밀해지고, 더욱 대담해진 범행 수법 때문이다.
과거의 묻지마 범죄들은 주로 늦은 시각, 타인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외진 곳에서 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달랐다. 범행 시각은 백주 대낮인 오후 2시였다. 범행 장소는 번화가인 서울 관악구 신림역이었다.
범행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피의자 조선(33)은 범행 하루 전 범행 하루 전 자신의 컴퓨터를 망치로 부수고 휴대전화를 초기화했다. 범행 10분 전에는 서울 금천구의 한 마트에서 흉기 2개를 훔치기도 했다.
심지어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고, 특히 범행 영상까지 광범위하게 시민들에게 퍼지면서 이번 범죄는 더욱 더 논란이 되고 있다.
문제는 해결방법이 요원하다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는 애당초 동기를 규명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보니, 그에 따른 해법을 찾기 어렵다.
2017년 한국법학회가 발간한 '한국법학회가 발간한 '묻지마 범죄의 형사정책적 대응방안'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의) 동기파악에 있어 피의자의 정신질환 내역이나 편견, 증오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동기를 찾기 어렵다"며 "따라서 묻지마 범죄에서는 정신분석적 접근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다보니 전문가들은 '묻지마 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범죄 가능성이 있는 이들의 정신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안전망을 중장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균관대학교 박승희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는 "(이번 신림 흉기 살인 사건 피의자도) 사회적으로 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사회안전망이 잘 깔려 있어야 그런 이들이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 있다"고 짚었다.
동국대학교 곽대경 경찰행정학과 교수 또한 "빈곤, 인간관계 등 사회적 외톨이들이 불만을 느끼고 있는 이유들을 조기에 파악해 개별적 상황에 맞춤형 치료나 상담,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개인의 각각 다른 상황에 적합한 상황별 대응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등 우리 사회복지 제도의 개선이라든지 사회 안전망 확충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