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사북 항쟁 당시 고문을 당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이 43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춘천지법 원주지원 형사1부(이수웅 부장판사)는 13일 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처벌받은 오항규(당시 48세)씨와 진복규(당시 45세), 양규용(당시 41세), 박노연(당시 31세)씨 등 4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사북 항쟁 32년 만에 이들은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지만 1992년부터 2017년 사이 이들 모두 사망하면서 법정에 서지는 못했다.
사북 항쟁 피해 당사자가 아닌 유족이 제기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북 항쟁을 주도한 이원갑(당시 40세)씨와 신경(당시 38세)씨는 2015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이들이 불법 집회를 열거나 광부를 선동하지 않았으며 경찰과 군 검찰이 불법으로 물 고문과 구타를 해 받아낸 허위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황한섭(당시 41세)씨와 강윤호(당시 33세)씨 등도 2021년과 지난해 각각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사북 항쟁 국가폭력 희생자는 8명으로 늘었다.
사북 항쟁은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당시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이었던 강원 정선군 사북읍 사북광업소에서 탄광 노동자들과 가족 6천여 명이 정부의 기본권 제약과 탄압, 저임금과 어용노조에 대한 누적된 불만으로 총파업을 벌인 사건이다.
탄광 노동자들은 사측과 유착한 어용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촉구했고 경찰까지 출동하면서 물리적 마찰이 빚어졌다.
불법 집회라며 해산을 요구한 경찰과 노동자들은 대치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노동자 2명을 차로 들이받는 일이 발생하면서 광산 노동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경찰 기동대까지 투입됐지만 노동자들의 반발은 거세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 1명이 사망하고 노동자 등 80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끝에 사측과 광산노조 등으로 구성된 '대책본부' 협상이 극적 타결되면서 갈등은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사북 항쟁 직후 제1군 계엄사령부 지휘아래 군과 검찰, 경찰로 구성된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이 200여 명의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해 고문을 일삼았고 검찰은 31명을 구속 기소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당시 계엄 포고령 위반 혐의로 기소된 오항규, 진복규 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양규용, 박노연 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아 1980년 8월 형이 확정됐다.
유족과 사북 항쟁 동지회는 이들과 함께 기소된 나머지 20명에 대한 검찰의 직권 재심 청구와 함께 수 백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직권 조사 결정을 검찰에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