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반도체 전쟁에 돌입했다. 중국과 반도체 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에 이어 일본과 유럽까지 모두 반도체에 사활을 걸었다.
특히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위해 '보조금'을 아끼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투자 유치에 나섰다. 다만 우리나라는 세제 지원에 그친 가운데 기업들은 추가 해외 투자를 고심하는 모양새다.
유럽도 '61조' 준비…獨佛 반도체 투자에 보조금 화답
25일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최근 독일에 300억 유로(약 42조 5300억 원)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 정부는 투자금의 1/3에 달하는 100억 유로(약 14조 1700억 원)의 보조금으로 화답했다.앞서 EU(유럽연합)는 반도체 공급망 재조정을 통해 아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반도체법을 발의했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 가운데 유럽의 비중을 현재 9%에서 2030년까지 20%로 확대하기 위해 430억 유로(약 61조 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반도체 왕좌'를 되찾으려는 인텔은 폴란드에도 46억 달러(약 6조 원)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 이미 인텔은 향후 10년 동안 유럽에만 800억 유로(약 113조 4천억 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유럽은 시스템 반도체 부문의 팹리스(반도체 설계)에 강점을 갖는다. 여기에 완성차 업체 등 반도체 수요가 큰 시장이다. 특히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해 '슈퍼 을'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ASML 등 반도체 장비 분야의 경쟁력도 뛰어나다.
인텔은 이 같은 유럽과 손잡고 반도체 1위 자리를 탈환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밖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인 TSMC도 독일에 100억 유로(약 14조 1700억 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또 글로벌파운드리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프랑스에 75억 유로(약 10조 6400억 원)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짓고, 프랑스 정부는 29억 유로(약 4조 1100억 원)를 보조금으로 지원한다.
美日 이어 인도 '반도체 보조금 전쟁' 참전
반도체 경쟁에 불을 지핀 것은 미국이다.미국은 지난해 520억 달러(약 67조 원) 규모의 보조금 지원을 골자로 한 반도체법을 시행했다. 그동안 '석유'로 전 세계 경제의 패권을 거머쥐었다면, 이제는 '반도체'로 전환한다는 상징적 사건으로 분석된다.
자국 기업인 인텔은 물론 파운드리 1위인 TSMC, 메모리 반도체 1~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모두 미국 투자로 보조금 신청 대상이다.
일본 역시 '반도체 강국'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1980년대 80%에 육박했지만 현재 10%로 떨어진 전 세계 반도체 점유율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10년 이상 자국 정부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조건으로 기업의 국적을 따지지 않고 보조금을 지원한다.
첨단과 범용 반도체 모두 설비 투자의 최대 1/3, 반도체 장비 및 소재는 최대 50%를 보조한다. TSMC와 삼성전자 등이 일본 투자로 보조금을 받게 될 예정이다.
여기에 차세대 '세계의 공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인도도 반도체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 정책에 따라 첨단 산업 제품을 현지에서 생산하면 매출 증가분의 4~6%를 보조금 또는 세제 혜택으로 돌려준다. 또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산업 육성을 위해 투자금의 최대 5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는 정책도 추진 중이다.
메모리 반도체 전 세계 3위인 마이크론은 인도에 약 27억 달러(약 3조 5천억 원)를 투자해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신설할 계획이다. 인도 정부는 13억 4천만 달러(약 1조 7천억 원)의 보조금을 지원한다.
국내 세액공제 상향됐지만…해외 투자는 '고심'
삼성전자는 2042년까지 300조 원, SK하이닉스는 121조 8천억 원을 각각 투자해 용인에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 세계적 추세와 달리 우리나라는 정부 차원의 직접적인 보조금 지원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세액공제 기본공제율을 상향한 이른바 'K칩스법'이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해 법인세 절감 등의 혜택을 받게 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은 향후 투자 방향을 놓고 '고심'이 깊은 모습이다. 국내는 상대적으로 투자에 대한 지원이 적어 아쉬움이 크다.
반면에 해외 투자가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다. 미국처럼 보조금 지원 '조건'을 명목으로 사실상 기업 비밀 등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를 할 가능성이 여전한 탓이다.
또 미국과 유럽 등 보조금을 지원하는 국가는 물가와 인건비 높은 편이라 향후 커질 부담도 계산해야 한다.
따라서 정부가 지정학적 요소를 고차원적으로 고려한 '경제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의 미래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세계 경제는 패트롤 달러 패권에서 반도체 패권으로 전환하고 있다. 지정학적‧경제적 중요성이 중동에서 동아시아로 넘어온다는 의미"라며 "두세 수 앞을 내다보는 정부의 전략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