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욕망 아닌 삶"…'15분도시 제주'에 담겨야 할 가치

[사라지는 근대 기억들⑫]에필로그
제주도민 생활상 엿볼 수 있는 근대건축물
개발 광풍 속 급속도로 훼손되거나 사라져
면피성 주민 설명회에 문화재 평가도 없어
또 다른 이름의 도시재생 '15분 도시 제주'
"단순 토목공사 아닌 역사와 문화 담겨야"

제주도심 전경. 이인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제주 첫 호텔 동양여관…명성 사라진 자리 남은 건 삶
②개발 광풍에도…제주 일식주택 100년간 서 있는 이유는
③포구 확장하고 도로 건설…사라지는 제주 어촌 '소통의 빛'
④택지 개발로 사라질 위기 제주 4·3성…주민이 지켜냈다
⑤'아픈 역사 축적' 제주 알뜨르비행장,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⑥무성영화 시대 제주 마지막 극장 철거…사라진 기억들
⑦4·3으로 초토화 된 제주 중산간 마을…뿌리 내린 사랑
⑧제주 최초 철골 건물 시민회관…허물어져도 기억은 유지
⑨보존계획 세워놓고 철거…사라진 제주 근대 도시의 얼굴
⑩한국건축계 '보존' 목소리에도…허물어진 '제주의 낭만'
⑪허물고 새 건물 올리던 제주 원도심…'오래된 미래'가 답
⑫"물질적 욕망 아닌 삶"…'15분도시 제주'에 담겨야 할 가치
(끝)

"건축물도 누군가의 죽음과 마찬가지입니다. 잘 기억하고 남기는 게 중요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고(故) 김중업씨가 제주시 용담동에 설계한 옛 제주대학교 본관이 허무하게 철거된 데 대해 제주대 건축학부 이용규 교수가 한 말이다. CBS노컷뉴스는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11차례에 걸쳐 사라지는 제주 근대 건축물을 소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국내 대표 관광지로 거듭난 개발추진기까지 도민의 삶과 역사가 담긴 근대 건축물은 하나같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허물어지는 제주 근현대사의 기억들

제주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4·3과 한국전쟁, 관광지 개발 시기를 거치며 독특한 형태의 근대 건축물이 곳곳에 들어섰다. 대표적인 제주만의 건축물은 밤바다를 환히 비추던 '도대불'과 4·3으로 초토화 된 중산간 마을에 세워진 아치 형태의 '테쉬폰'이다, 아픈 역사이지만 4·3성도 있다.
 
당시 제주도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근대 건축물들은 개발 광풍 속에 대부분 사라졌다. 과거 제주 해안 30여 곳에 있던 도대불은 항만시설 확장과 해안도로 건설 과정에서 허물어지거나 훼손됐다.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은 제주시 북촌리‧고산리‧김녕리 등 6곳에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고(故) 맥그린치 신부가 4·3 이후 가난했던 중산간 마을 주민을 위해 세웠던 테쉬폰 역시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200채 가까이 있었지만, 현재 23채만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2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유지에 있어 개발 흐름 속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에 처해 있다.
 
테쉬폰(사진 왼쪽)과 도대불. 고상현 기자

민간인 수용소, 4·3성, 잃어버린 마을 등 다양한 형태로 아픔을 간직한 제주4·3유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도로 확장과 주택 건설 속에 비극의 흔적은 지워지고 있다.
 
한평생 4·3유적 연구에 매진한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은 개발 광풍 속에 사라지고 있는 4·3유적뿐만 아니라 근대 유적이 사라지고 있는 데 대해 "보존하려면 확실히 해야 하는데 제주도는 그런 게 없다. 역사적인 건물들을 다 허물어버렸다. (행정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물질적 욕망이 행정의 몰상식함으로"

과거 행정과 상업 중심지인 제주시 원도심의 화려했던 모습을 간직한 '옛 제주시청사'는 제주시가 용역을 통해 보존계획을 세워놓고도 지난 2012년 12월 건물을 철거했다. 특히 건물이 남아 있을 때 매입 시도조차 안 하다가 건물이 철거된 이후 20억여 원을 주고 사들여 주차장을 만들었다.
 
제주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김석윤씨가 현대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으로 불리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스타일로 설계한 '옛 국립수산물품질검사원 제주지원'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특히 행정은 철거 과정에서 면피성 주민 설명회에 문화재 가치 평가도 하지 않았다.
 
르 코르뷔지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였던 고(故) 김중업 건축가의 혼이 담긴 '옛 제주대 본관'은 지금 남아 있다면 유명 관광지로 각광받았겠지만, 지금은 흑백 사진 속에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건축계가 나서 보존 운동을 벌였지만, 제주대가 활용가치가 없다며 철거한 것이다.
 
옛 제주대학교 본관 모습. 김중업박물관 제공

제주 최초의 현대식 문화공간인 '현대극장'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2018년 마지막 날 건물 철거 때 그 모습을 기록한 송종효 사진작가는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 촬영하고 있다. 과거와 비교하면 현재 원도심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체가 제주다운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을 지낸 박경훈 작가는 "'개발이 곧 땅값도 올리고 집값도 올린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깔려 있다. 행정의 몰상식함도 문제지만, 물질적인 욕망이 행정의 행태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분명 근대의 시간도 존재했는데, 현재 이를 보여줄 건물은 없다"고 했다.
 

"제주 근대 건축물 '15분 도시'에 녹여내자"

그동안 제주에서 이뤄진 도시 재생사업은 도로를 확장하고 낡은 건물 대신 새 건물을 올리는 형태로 진행돼 왔다. 지난해 민선8기 오영훈 제주도정은 '15분 도시'라는 이름의 또 다른 도시 재생사업을 핵심 공약으로 내놨다. 현재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15분 도시'는 모든 시민이 집에서 도보 또는 자전거, 대중교통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교육, 의료, 문화, 쇼핑, 여가 등 다양한 생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도시를 의미한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포틀랜드,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 전 세계에서 계획이 이뤄지고 있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주요 기반사업으로 언급되는 것은 트램 도입 등 교통 환경 개선과 기초생활시설 확충 등 기존 도시 재생사업과 맥을 같이 한다. '15분 도시'라는 미명 하에 과거 개발 논리 속에 사라진 근대 건축물의 전철을 다시 밟을 우려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15분 도시 계획 구상을 끝낸 부산시 사례가 눈에 띈다. 생활권을 나눠 보행 중심의 생활편의 시설을 촘촘하게 배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산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15분 도시 구상에 담고 있다. 고대부터 근‧현대 역사를 활용해 도시를 '삶'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제주시 원도심. 고상현 기자

고영림 제주국제문화교류협회장은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은 도시 재생이라는 거대한 담론 이전에 과거 세대의 물리적 공간이자, 그들의 이야기다. 건물이 없어진다는 것은 삶의 이야기가 없어진다는 거다. 이야기의 전승은 미래 세대와의 대화이기도 하다. 지켜야 한다"고 했다.
 
김영수 도서관 등 근대 건축물을 미래 세대에도 이어지도록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한 탐라지예건축사사무소 권정우 소장은 "현재 15분 도시의 방향이 맞는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인데 자칫 온실가스를 더욱 배출하는 토목공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도 읍면동이나 도심지에 남아 있는 오래된 건축물을 허물거나 방치할 게 아니라 도민이 과거와 소통하며 사용할 수 있는 생활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