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반 국내 영화계를 강타했던 농구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랭덩크' 열풍. 465만 명 이상 관객을 모은 엄청난 흥행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그 열기는 아직 식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바로 코트에서다. 슬램덩크가 불을 붙인 농구에 대한 열정이 코트를 달구고 있다.
특히 남성뿐만 아니라 실제 농구를 즐기는 여성 동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슬램덩크를 본 뒤 생긴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완전히 농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모양새다.
서울 강서구민올림픽체육센터에서 농구 교실을 맡고 있는 허진수 코치는 "20년 이상 회원들을 지도해왔는데 올해처럼 많이 회원이 늘어난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성 회원들도 그동안 거의 없었는데 8명이나 등록을 했다"고 귀띔했다.
그동안 이 농구 교실은 10~15명 정도로 운영이 돼 왔는데 올해 25명 정원을 꽉 채웠다. 허 코치는 "사실 더 많은 인원이 수강 신청을 했고, 정원을 늘려 달라는 민원이 이어져 30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프로농구 SBS,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던 오광택 코치가 맡고 있는 서울 중계구민체육센터 농구 교실은 아예 1개 반을 늘려 30명씩 2개 반이 운영 중이다. 60명 중 20명이 여성 회원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진행되는 강서구민올림픽체육센터 농구 교실에는 가장 어린 대학교 1학년생부터 8명의 여성 회원들이 남성 회원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농구공과 씨름하고 있다. 고려대와 프로 삼성 출신 허 코치의 기본기를 강조하는 엄격한 지도 방법에도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와 달리) 싫증을 내지 않고 묵묵히 드리블 등 기초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프리랜서 작가인 박선우 씨(32)는 "슬램덩크 영화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았다"면서 "실제로 농구를 하면서 영화에서 나오는 등장 인물과 같은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박 씨는 "그런데 농구를 하다 보니 너무 재미가 있다"면서 "처음에는 한두 달 해볼 생각이었는데 1년 수강을 끊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박 씨는 "나처럼 영화를 보고 입문했다가 농구에 빠진 여성 분들이 적잖다"면서 "아직 여성 동호회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SNS 등을 통해 교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로 일을 하고 있는데 스트레스도 풀고 운동도 하고 여성에게 일석이조"라고 강조한다.
역시 농구는 남성들의 피를 끓게 하는 스포츠. 역시 올해 이 농구 교실에 가입한 회사원 이성욱 씨(32)는 "예전에 농구를 좋아했고, 가끔 운동을 하긴 했다"면서 "그러다 슬램덩크를 본 뒤 예전 열정이 살아나 바로 근처 농구 교실을 알아보고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농구 교실 창설 때부터 참여하고 있는 '개국 공신'들의 감회도 새롭다. 맏형 심정훈 씨(55)는 "농구 교실 초창기만 하더라도 여성 회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면서 "잘 하지 못해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김상현 씨(51)도 "요즘 인기를 보면 예전 농구대잔치 시절이 떠오른다"고 말했고, 박정제 씨(49)도 "학창 시절 '슬램덩크' 만화책에 열광했는데 이제 MZ 세대들은 영화에 환호하니 명작은 영원한 것 같다"고 했다.
대한민국농구협회 문성은 사무처장은 "1년 단위로 등록 작업을 하기 때문에 아직 정확한 통계는 없다"면서도 "확실히 여성을 비롯한 동호인들이 늘어났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있다"고 말했다. 협회에 따르면 등록 동호인 팀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230개, 선수는 6810명이다. 주로 실외 코트에서 펼쳐지는 3ⅹ3 농구 동호인은 2021년 1086명에서 지난해 1731명으로 크게 늘었고, 올해 3월까지 1788명으로 집계됐다.
이에 대해 문 처장은 "사실 코로나19 때 실내 스포츠가 거의 멈추다시피 했기 때문에 농구 등록 동호인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최근 인기가 살아나면서 올 연말 조사 때문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하거나 더 많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농구는 1990년대 농구대잔치와 만화 '슬램덩크', 드라마 '마지막 승부'까지 신드롬을 일으키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프로농구(KBL) 출범의 바탕이 됐지만 이후 국제 대회 부진과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유망주 발굴 실패 등으로 인한 스타 부재로 인기가 식었다. 겨울 스포츠의 맹주 자리도 배구에 내줬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농구 대통령' 허재 전 국가대표 감독의 아들 허웅(전주 KCC)와 허훈(상무) 등 스타성을 갖춘 선수들과 최근 이현중(산타크루즈), 양재민(우츠노미야), 여준석(곤자가대) 등 차세대 대형 선수들이 나오면서 달라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문 처장은 "명승부가 펼쳐진 안양 KGC인삼공사와 서울 SK의 KBL 챔피언 결정전과 국가대표 경기들을 보면 젊은 여성 팬들이 많이 늘었다"면서 "예전 농구대잔치 시절처럼 인기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고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농구의 봄이 온 것일까. 영화 '슬램덩크'가 촉발한 농구 붐이 반짝 열기에 그치지 않고 예전의 전성기 시절의 인기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