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계엄군에 연행된 9살 소년…43년 만에 피해 사실 확인

[광주CBS 5·18 43주년 연속기획-사각지대에 놓인 또다른 5·18 피해자①]
5·18 당시 초등생 조영운씨, "계엄군에 연행된 뒤 복지시설로 보내져 생활"
조씨와 학창시절 함께한 친구 "친구들과 다른 차원의 외로움, 얼굴에는 그늘"
조씨 지인 "손 떨고 몸 안 좋아 보여 트라우마 영향 아닐까 걱정"
10살 전후 행방불명 아동 中 5·18 피해자로 인정받을지 주목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별관 2층에서 9일 열린 '5·18민주화운동 미공개 사진전'에서 조영운씨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박성은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5·18 당시 계엄군에 연행된 9살 소년…43년 만에 피해 사실 확인
(계속)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던 9살 소년이 계엄군에 의해 강제 연행된 이후 강제로 보육시설로 보내져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는 주장이 사실로 확인됐다.
 
지난 1980년 5월 27일 5·18 마지막 항쟁지인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가 이뤄진 이후 버스에 몸을 숨긴 조영운(52)씨가 당시 계엄군에 연행되는 모습이 국내·외 사진기자와 작가가 찍은 사진을 통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이로써 조씨는 5·18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해 강제 연행된 이후 입양되거나 보육시설 등을 전전해야 했던 10살 전후의 아동 가운데 가장 먼저 5·18 피해자(보상자)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군인들이 끌고 가려해 도망쳤다"…9살 소년 증언, 43년 만에 사실로 확인

9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에 따르면 현재 경북 구미에 거주 중인 조영운(52)씨는 1980년 5월 27일 당시 계엄군이 총탄을 발사하자 버스에 몸을 숨겼지만 계엄군에 발견돼 끌려갔다고 증언해 왔고 조씨의 증언이 당시 촬영된 사진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앞서 진상규명위는 5·18 당시 프랑스 사진 작가가 찍은 사진을 확보했다. 이 사진에는 계엄군이 머리카락이 짧은 소년을 끌고 가는 장면이 담겼다. 진상규명위는 지난 3월 조영운씨가 소장하고 있는 어린 시절 사진과 조씨 증언을 토대로 사진 속 소년이 조영운씨라는 것을 확인했다.
 
진상규명위 관계자는 "지난 2021년 조씨를 상대로 사전 면담을 진행할 때는 조씨가 5·18 피해자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었다"며 "지난 3월 프랑스 사진 작가의 사진을 확보하고 직접 경북 구미에 가서 조사를 진행해 조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어 "조씨를 포함해 당시 헌병대에 끌려가 일주일 정도 머문 것으로 파악되는 내무반에 3명 정도의 아동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9살 정도면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한데도 아이들을 관리한 계엄 당국은 왜 아이들을 집이 아닌 시설로 보내려 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실종된 것으로 파악된 13세 미만 실종자 3명을 전투교육사령부 헌병대가 관리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인 아동권리보장원에 실종자 3명의 이름을 의뢰해 입양됐거나 시설에 체류했는지 등을 조사 중이다.

<인터뷰>가족과 생이별한 조영운씨…"이후 43년 동안 혼자 지내게 됐다"

 1980년 5월 27일 오전 11시쯤 광주 동구 전남도청 앞 분수대 인근.
 
갑자기 울려 퍼진 총격 소리에 놀라 버스에 몸을 숨긴 조영운군은 잠시 뒤 계엄군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 조군은 당시 9살로 광주남국민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조군은 이후 13살이던 1984년까지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소년의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생이 되자 부산에 있는 소년의집으로 보내져 1985년부터 20살이던 1991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조영운씨의 중학교 1학년 때 모습. 본인 제공
실제 조씨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소년의집을 통해 조씨가 해당 시설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부산 소년의집 관계자는 "조영운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부산 소년의집에 있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조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을 하기 위해 충북 청주 등 타지를 돌아 다녔으며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년 전 기초수급자가 됐고, 소년의집에서 만난 친구들과 선·후배의 권유로 경북 구미에 정착했다.
 
조영운씨는 현재 경북 구미에 있는 자활공동체에서 일하고 있다. 43년 전 일에 대해 묻자 조씨는 힘겹게 입을 뗐다.
 
조씨는 "1980년 5·18 당시 어머니를 찾으러 전남도청에 갔다가 총격전이 벌어져 버스에 숨어있었는데 버스 문이 열리더니 군인 두 명이 들어와 저를 데리고 나갔다"며 "광주 송정리 공수부대로 데려가 며칠 정도 있다가 군용차에 태워서 가는데 집이 어딘지는 전혀 묻지 않아서 고아원으로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차량이 정차했을 때 뛰어서 도망쳤고 시외터미널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버스를 타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서울이었다"면서 "파출소에 있는 유치장 같은 곳에서 하루 자고 일어나서 집이 광주라고 얘기했는데 경찰관이 집에 보내준다더니 호송차량 비슷한 차에 태워서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아동보호소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 이후 조씨는 10년 가까이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인터뷰>외로움·생활고 시달려…본인 찍힌 사진 보며 "이런 날도 오는구나"

지난 4일 경북 구미의 한 카페에서 조영운씨를 만났다. 박성은 기자

조씨는 가족과 생이별한 이후 정서적·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조씨는 "가족 없이 홀로 지낸 것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며 "돈가스라는 음식을 고등학교 이후에 알았을 정도로 돈을 써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2년 전 경북 구미의 자활센터에서 만나 현재 조씨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이용수(가명)씨는 조영운씨를 처음 봤을 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씨는 "처음 조씨를 봤을 때 얼굴 빛이 너무 안 좋아서 깜짝 놀랐다"며 "손도 떨고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길래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더니 본인이 광주에서 겪은 일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조씨는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을 받아서 동네 강아지들한테 간식을 주는 사람이다"며 "본인이 한창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힘들었던 마음을 동네 강아지들에게 잘해주면서 위로받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씨는 1980년대 후반인 고등학생이 돼서야 꿈에 그리던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조영운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교장실에 갔더니 검은색 정장을 입은 두 명이 있었다"며 "실종자 명단이라는 서류에 내 이름이 있었고 아버지도 뵐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 이후 조씨의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다. 조씨는 "부모님과 떨어져 여동생 두 명과 누나도 각자 다른 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는 더이상 부모님을 찾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조영운씨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졌지만 고등학교 이후 취직 하는 게 상당히 어려워 물류창고 일이나 일용직 일을 하다 보니 몸이 더 안 좋아졌고 최근에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조씨와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김근수(52)씨는 "음악을 유난히 좋아해 바이올린 연주도 하고 그랬던 친구"라고 조영운씨의 유년기를 기억했다.
 
이어 "시설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부모와 형제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찾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차원의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며 "항상 그늘이 있는 모습이었고, 마음고생이 남들보다 더 심했겠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안타깝고 안쓰럽다"고 말했다.
 
43년이 지난 3월. 그제야 5·18 당시 연행돼 시설을 전전했다는 조씨의 증언이 사실로 드러났다. 조씨는 진상규명위가 가지고 온 사진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조씨는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사진을 봤을 때 얼굴 형태나 몸 형태가 분명 저와 틀림없었고 뭐라 말을 못할 정도로 몸이 떨렸다"며 눈물을 흘렸다.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43년이 흘렀지만 조씨는 여전히 그날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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