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주택도시공사(SH)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보증금과 임대료가 5% 인상된 가운데, 서울시가 입주자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임대료 인상을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관련 조례가 개정되면서, SH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료 조정 권한이 SH에서 서울시로 넘어갔다. 서울시에 임대료 조정을 논의하는 공공주택임대료 조정위원회가 구성됐지만, 해당 위원회에는 입주자 대표는 물론 이들을 대변할 주거복지 전문가나 시민단체 관계자 등도 포함되지 않았다.
'주거·집값 안정'하려다…인상 부추기고 만 조례 개정
서울시 공공주택 임대료 조정위원회는 SH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보증금과 임대료를 5% 인상하기로 지난 4일 최종 의결했다. 이에 따라 오는 7월 1일부터 내년 6월 30일 사이 재계약을 앞둔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임차인들의 임대보증금과 임대료가 5% 인상될 예정이다.
공공임대주택에 사는 입주민들은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인상을 통보받았다며, 당장 목돈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와 SH는 절차상 하자가 없었고, 그동안 인상하지 않았던 임대료를 현실화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관련기사: SH, 공공임대 보증금 5% 올려…"노인네가 돈이 어딨나" 눈물]
지난해까지만 해도 서울시가 아닌 SH가 공공임대주택 임대료를 조정했다. 하지만 SH는 2011년 한 차례 임대료를 조정했을 뿐, 10년 넘게 공공임대주택 전반에 대한 임대료 조정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
SH 관계자는 "주변 시세와 연동해 보증금을 조정해야 하는 주택(장기전세주택 등)에 대해서는 SH 내부적으로 위원회를 열어 논의했다"면서도 "시세와 무관한 7대 공공임대주택(영구임대·국민임대·공공임대·재개발임대·주거환경임대·매입임대·희망하우징)에 대해서는 워낙 반대가 많아 임대료 조정을 검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월 21일 정진철 전 서울시의원은 SH가 아닌 서울시에 전세가격조정위원회를 두도록 하는 '서울특별시 공공주택 건설 및 공급 등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발의했다.
다만 당시 개정안을 발의한 목적은 '입주자 주거 안정과 서울시 집값 안정'이었다. 정 전 의원은 "당시 장기전세주택의 보증금을 시세에 맞춰 조정되니, 장기전세주택 보증금을 인상할 때마다 반대가 많았다"며 "SH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보니, 투명하게 여론을 반영해 임대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조례 개정안을 발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례 개정안 초안에는 SH가 아닌 서울시 산하에 가격조정위원회를 두고, '입주자 대표'와 '주택 소재지 지역구 시의원'을 위원으로 선출한다는 조항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조례 개정안이 시의회에서 논의되는 동안 위의 조항은 모두 빠졌다. 각종 주택 관련 전문가들은 가격조정위원회에 포함됐지만, 정작 입주민들을 직접 대변할 수 있는 위원은 없었다.
정 전 의원은 "애초 장기전세주택에 한해서 위원회를 두는 안을 발의했지만, 논의 과정에서 공공임대주택 전체에 대한 위원회로 확대하기로 결정됐다"면서 "그러던 중 위원회 구성에서 입주자 대표와 주택 소재지 지역구 시의원을 위원으로 두자는 내용은 빠져버렸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입주자 대표와 지역구 시의원은 무조건 들어가야 했다"면서 "조례 개정안 발의 당시 이렇게 임대료가 5% 일괄 인상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덧붙였다.
임대료 인상 결정한 위원회 살펴보니…입주민 측 위원은 '0'
현행 서울시 공공주택임대료 조정위원회 위원 명단을 살펴본 결과, 입주자를 직접 대변할 수 있는 구성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SH·서울시·서울시의회 관계자 4명을 비롯해 부동산 컨설팅 대표이사나 교수·변호사·회계사·연구원·감정평가사 등 각종 주택·부동산 분야 전문가들로만 구성돼 있었다.입주자를 직접 대변할 수 있는 주거복지 전문 시민단체 관계자는 물론이고, 입주자대표 당사자도 제외됐다.
전문가들은 해당 위원회가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위원회 구성을 살펴본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공공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얘기해 줄만한 주거복지 전문가가 없다"면서 "도시계획위원회도 아니고 이러한 구성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거수기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원들로 구성됐다"고 꼬집었다.
이어 "일방적인 결정이 날 수밖에 없는 위원회에서 내린 결정을 수십만 명의 입주자들이 무슨 이유로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입주민들 또한 이번 인상에 입주민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한 임대주택에 사는 하모(47)씨는 "원래 입주자 대표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있다고는 하던데, 완전 남의 얘기"라며 "나 또한 SH나 서울시로부터 직접 들은 바 없이, 운 좋게 주변에서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송파구 위례동의 한 임대주택에 사는 김정자(70)씨는 "SH나 서울시로부터 임대료 인상 소식을 직접 들은 적 없고, 의견을 묻는 절차도 당연히 없었다"면서 "적어도 입주민들과 의논을 하고, 입주민들에게 임대료를 몇퍼센트 올릴 건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으면 좋겠다. 우리도 인격과 권리가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위원은 "입주자 대표가 회의에 참관이라도 하면 어떻겠냐고 이야기가 오갔지만, 결국 참관조차도 안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임차인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게끔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서진형 공정주택포럼 공동대표는 "공공임대주택은 공공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입주자의 의견과 공공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시민단체 대표 정도는 위원으로 들어가야 임대료를 공정하게 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 소장 또한 "이러한 위원회를 구성할 때 (다수 의견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포함시켜야 하고, 이견이 나올 수 있는 구조가 되게끔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