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안 바꾸면 전세사기 끝나지 않을 것…정부, 잘못 인정해야"
"(건축왕 A씨가)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나 홀로 빌라, 아파트를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세를 조작했습니다. 제도가 이를 뒷받침 해줬습니다. 경찰도 처음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게 가능해. 진짜야. 그런 사기였습니다."
18일 오후 7시 인천시 미추홀구 주안역 광장에서 열린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발족식'에 참석한 안상미 인천 미추홀구전세사기대책위원회 위원장의 손에 있던 마이크가 부르르 떨렸다.
안 위원장은 "정부가 만든 제도를 믿고 전세 계약을 맺었는데 주위를 봤더니 미추홀구 일대가 쑥대밭이 됐다"며 "전세사기는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지는 사회적 재난"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안 위원장은 "지금 정부는 사인의 거래이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지만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이 사태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의 제도가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대책의 시작이고 전세사기 예방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수도권에서 제주까지' 확산하는 전세사기 피해…전국 단위 조직 발족
이날 열린 대책위 발족식에는 전세사기 피해자와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수도권뿐만 아니라 제주도까지 전국에서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모였다. 지난해부터 사회적 문제가 된 전세사기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산, 광주, 대전, 제주 등 전국으로 확산하자 전국 단위 조직을 만든 것이다.
대책위에는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미추홀구깡통전세피해시민대책위원회, 민달팽이유니온, 주거권네트워크, 주택세입자법률지원센터(세입자114) 등 65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제도와 정책을 믿었더니 남은 건 빈털터리 신불자", "사기꾼은 결혼식, 피해자는 장례식", "잘못된 정책들이 서민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전세사기 피해, 당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등의 문구가 적힌 손펫말을 들고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대책위는 인천이 피해 사례의 3분의 1가량이 집중된 점을 감안해 이 곳에서 발족식을 열기로 결정했다. 특히 인천에서는 최근 두 달 사이 전세사기 피해자 3명이 잇따라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책위는 앞으로 전세사기가 단순히 개인 간의 거래 문제가 아닌 정부의 제도 미숙으로 인한 발생한 구조적인 문제인 사회적 재난라는 점을 강조할 계획이다.
대책위가 이날 발표한 요구안은 △전세 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범정부 TF 구성과 대통령 면담 △전면적인 실태조사와 피해유형별 지원대책 수립 △피해자 상담 및 지원 시스템 개선 △피해주택 경매 일시중지 △긴급주거지원제도 개선 △전세 사기 피해구제 특별법 제정 △경매 시, 국세·지방세 감면 또는 변제순위 조정 등이다.
"무거운 책임감 느낀다더니…피해자들은 누굴 믿나"
대책위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지난 2월 첫 희생자가 나왔을 때 더 이상의 죽음은 막아야 한다고 절박하게 외쳤지만 '선 지원 후 회수'를 검토한다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말은 휴지 조각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난 주말 2명의 희생자가 추가로 나오자 원 장관은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의미 없는 소리를 한다"면서 "피해자들은 누구를 믿어야 하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대책위는 "전세사기 피해는 개별 노력으론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참사이자 학살"이라며 "조직적으로 부풀린 시세도, 임대인의 수십억원대 체납 사실도 미리 알 수 없는 허술한 제도가 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무분별한 전세대출과 묻지마식 보증, 보증 보험 부실 등에 명백한 책임이 있는 정부가 문제를 적극 해결해야 한다"며 "제4, 제5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힘을 모으자"고 강조했다.
정치권 "피해자 구제 특별법 발의 계류 중…통과시키겠다"
출범식 이후에는 최근 이른바 '건축왕' 일당의 조직적인 전세사기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숨진 20~30대 청년 3명에 대한 합동 추모식이 열렸다. 피해자들은 일정 금액의 최우선 변제금도 보장받지 못할 처지에 놓이거나, 수도 요금을 제때 납입하지 못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추모제에 참석한 대책위 관계자와 시민 등 200여명은 촛불을 들고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대책위 측은 유족 측의 신상 비공개 요청에 따라 사진이 없는 고인들의 영정을 놓고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추모식에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박찬대·허종식 국회의원과 정의당 심상정 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도 참석했다. 추모식을 찾은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우리 청년들이 성실하게 일해서 한 푼, 두 푼 쌓아 올린 미래를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어둠 속에서 몸부림칠 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냐"며 "정부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허종식 의원도 "정치가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면 정치할 필요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있다. 참담하고 죄송하다"며 "지금 국회에서 피해자들을 구제할 특별법이 발의돼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